한화이글스가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결국 문제는 내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소속이었던 데서 출발한 것이라고, 16살의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다. 소속이 문제였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 럽, 박민규
운동을 잘해본 적은 없지만, 운동경기는 누구보다 사랑해 왔다. 고등학교 시절엔 농구경기 보는 재미에 빠져 야간자율학습을 몰래 빠져나오곤 했다. 지금 재학생이 라도 된것 처럼 연고전의 패배 앞에서 눈물을 쏟고, 승리의 순간엔 환호하며 가슴이 뜨거워지던 시절. 선수 이름과 경기 규칙을 줄줄 외우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던 그때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열성적인 소녀 팬이었다.
성인이 되고, 대학농구 선구들이 하나둘 프로야구로 이동하며 흥미가 사라졌다. 이후 자연스럽게 야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회사 일을 마치고 잠실야구장에서 마셨던 맥주 한 모금의 시원함이 아직도 선명하다. 농구와 다른 점은 단 하나, 이번엔 내 자유의지로 학교 땡땡이 안치고 응원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는 것. 나는 그렇게 두산의 팬이었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했다. 상대는 한화이글스를 오래도록 사랑해 온 팬이었다. 야구로 만난 건 아니었지만, 그의 인생엔 늘 한화가 있었다. 결혼을 하고 첫 아이가 태어나자 자연스레 아이도 한화 팬이 되었다. 다섯 살 무렵부터 아빠와 캐치볼을 시작했고, 어느새 아들은 중학생이 되었고, 방과 후 연식 야구부에 들어갔다. 나는 그냥 취미 활동 정도로 생각했는데, 완전히 오산이었다. 여름방학 내내 오전 훈련, 주말엔 연습 경기. 서울 연식야구 대회 3위라는 성과까지 해내며, 어느 순간 아이의 일상은 거의 선수처럼 굴러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야구를 시킬걸…”
가끔 이런 후회가 들 만큼 아이는 열정적이었고, 그 열정과 성실함이 공부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다. 12월 중순 기말고사가 코앞이지만, 아이는 기말 전 주말에있을 야구대회 준비에 온 마음을 쏟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한화 이슬스 팬의 삶이란… 패배가 일상이었다. 초등학교때 아들은 야구 경기가 끝날 때마다 울었다.“오늘도 졌어… 이제 안 볼래!”화도 내고 투덜대면서도, 팀을 바꾸자는 말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화 팬들은 오래전부터 ‘보살’이라는 별칭을 얻어왔지만, 매 시즌 우승을 꿈꾸는 이상한 낙관주의가 있다. 우리 가족도 그랬다. 둘째가 태어나자마자 자동으로 한화 팬이 되고, 나도 자연스럽게 한화를 응원하며 온 가족이 한화이글스의 찐 팬이 되었다.우리는 잠실, 인천, 대전, 창원까지 야구장을 누비고, 티켓팅에 열을 올렸다. 유니폼을 사고, 굿즈를 모았다. 자주 졌지만 한화팬은 더 늘어 티켓팅은 피켓팅이라는 말이 나오고, 심지어 암표가 백만 원에 호가한다는 뉴스를 본 적 있다. 아직도 대전에서 직접관람해 보는게 소원이 될 만큼 두 남자에게 간절하다. 다음 시즌은 가능할런지-
그러던 올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화이글스가 준우승을 했다. 한국시리즈 티켓팅을 모두 실패하고 집관하던 우리는 떠나갈 듯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준우승일지도 모른다”라고 웃픈 농담을 했고, 아들은 “나는 한번은 우승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대에 찬 눈을 반짝였다.
매년 희망고문을 당하는 부자가 가끔은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야구가 뭐라고 인생을 논하는가 싶다가도, 그들의 가슴속에 자리한 ‘순수한 열정’이 부럽기도 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경기마다 어깨가 축 처져 보던 두 남자를 보며 장난으로 놀리기 바빴지만, 올해만큼은 작은 박수를 보냈다. 꼴찌 팀도 언젠가 비상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한 해.
언젠가 이 뜨거움이 야구에 성실한 아들의 삶에도 버팀목이 되길 바란다. 부디, 내년에도 독수리가 지금처럼 날 수 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