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Leon)
Nobody sent me. I do business for myself.
마틸다(나탈리 포트만)는 대낮에 온갖 총들을 음식 포장용기에 담고서 마약단속국(DEA)으로 들어섰다. 스탠스필드(게리 올드만)를 찾아 화장실로 들어간 마틸다는 드디어 거기서 그와 마주하지만, 총은 꺼낼 생각조차 못하고 두려움에 그대로 얼어붙고 만다. 스탠스필드는 그런 그녀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지시한 배후가 누구냐고 추궁한다. 그리고 마틸다로부터 돌아온 대답. 배후는 없어요. 나 혼자서 한 일이에요.
So this is something personal?
마약단속국 소속 경찰 스탠스필드는 돌아온 대답에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마틸다에게 되묻는다. "그래서 이게 사적인 일이라고?"
그렇다. 마틸다는 자신의 4살짜리 이복 남동생을 죽인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거기에 갔다. 그가 (부패한) 경찰이라는 사실, 그가 근무하는 곳이 마약단속국이라는 사실, 모든 경찰들이 근무를 서고 있는 한낮이라는 사실은 마틸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어린 동생을 죽인 사람이 스탠스필드이고 때마침 그가 마약단속국에 있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마틸다는 포착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들어선다. 마틸다에게 스탠스필드는 그저 복수의 대상일 뿐. 그가 마약단속국 경찰이라는 사실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즉 스탠스필드가 내면화한 경찰이라는 기표가 마틸다 앞에서는 허물어진다. 이는 킬러인 레옹(장 르노)도 마찬가지다. 마틸다에게 레옹은 킬러가 아니라 애인(lover)이다.
스스로를 청소부(cleaner)라 지칭하는 레옹의 공식 직함은 살인청부업자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계획한 대로 사람을 죽이며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게다가 그 일을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무자비한 킬러다. 이 사실은 마틸다를 동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레옹은 가족을 몰살시킨 살인자들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고마운 사람이자 자신의 복수를 도와줄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첫사랑이다. 그래서 그를 위해 장을 보고 식사 준비를 하며 문맹인 그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준다. 유명한 킬러라는 레옹의 이름표 역시 마틸다 앞에서는 무색하다. 오직 마틸다만이 레옹에게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라 질문을 한다. 마틸다의 거리낌 없는 물음들 앞에서야 레옹은 킬러가 아니라 그냥 '레옹'이 된다. 그리하여 몸에 걸치던 것들을 하나씩 벗게 된다. 두꺼운 외투와 모자, 잘 때조차 쓰고 있던 선글라스까지 모두.
마틸다에게 레옹이 사랑의 대상인 한편 스탠스필드는 복수의 대상이다. 사랑도 복수도 둘 다 욕망이다. 그것도 아주 사적인. 마틸다의 사적인 욕망 앞에서 두 남자는 모든 기표가 제거된 채 벌거벗게 된다. 스탠스필드는 상징계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법으로 자처하며 모든 일을 통제하려 한다. 임무 수행이라는 명목 하에 사적인 욕망을 충족한다.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경찰이라는 공식 직함으로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자신이 곧 법이라는 것 외에 스탠스필드에게는 애초에 규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레옹은 상징계보다 상상계에 더 가까이 머무는 인물이다.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이라는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거울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마치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아이처럼 연신 우유만 마신다. 이 공간에서 그가 하는 일은 살인이 아니라 청소인데, 스탠스필드와 달리 여자와 아이는 청소에서 제외한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또한 스탠스필드의 살인 행위가 자신의 욕망에 따른 것인 반면 레옹의 행위는 타인[토니(대니 에일로)]의 명령에 따른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레옹 역시 스탠스필드와 마찬가지로 살인자인데, 마틸다를 살렸다는 점에서 그와 구분된다. 그리하여 마틸다는 레옹을 사랑하게 되고 스탠스필드는 증오하게 된다. 이렇듯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는 두 남자는 마틸다라는 교집합에서 만난다.
영화에서 마틸다와 레옹, 스탠스필드 세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없다. 마틸다와 레옹, 마틸다와 스탠스필드 이렇게 각각 만나다가 마지막에서야 스탠스필드와 레옹이 만난다. 처음으로 마주한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죽는다. 마틸다라는 고리로 손을 맞잡은 레옹과 스탠스필드는 함께 포개진 채 폭발한다. 마틸다는 복수에는 성공하지만 사랑은 잃고 말았다. 이 결말은 절박하게 초인종을 누르는 마틸다를 향해 레옹이 문을 연 순간 이미 예견되었던 것 같다.
I don't give a shit about sleeping, Leon. I want love or death. That's it.
복수하고 싶다는 마틸다를 달래기 위해 레옹은 잠을 잘 자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그녀를 달래려 했다. 거기에 대한 마틸다의 반응. 사랑 아니면 죽음. 그것뿐이라.
처음부터 마틸다에게 사랑과 복수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은 애초에 복수에 기반한다. 그녀가 레옹의 집에 들어선 이후 먹은 마음은 사랑하던 어린 동생을 죽인 자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살의였다. 이 삶의 목표를 달성케 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자신의 목숨을 구한 레옹이다. 마틸다는 그에게 자신을 살리기로 한 선택의 책임을 다하길 요구한다. 그렇게 레옹은 마틸다의 복수라는 욕망을 위한 도구가 된다. 그런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사격 연습을 하는 등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연마하는―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생기니, 곧 사랑이다. 그러나 마틸다의 욕망에서는 복수가 사랑에 선행한다. 의식의 세계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보다 복수가 먼저 자리 잡았다. 그러니 레옹과 마틸다의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우선 복수가 수행되어야만 한다. 복수가 성공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고, 레옹은 그녀를 살리기로 한 책임을 자신의 생명으로 져야 한다. 죽을 위험에 처한 한 생명을 구한 대가가 그가 문을 연 그때 벌써 치러지고 있었던 셈이다.
문은 열지 않으면 벽과 다를 바 없다. 마틸다에게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 레옹에게 문이란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벽에 불과했다. 그것은 열리기보다 닫히기에 급급한 것이었다. 마틸다가 초인종을 누르고 제발 열어달라고 애원했을 때, 그 문은 비로소 문이 되었다. 문을 열면 틈이 생긴다. 그리고 그 틈으로부터 언제나 예상 불가능한 무엇이 내부로 스며든다. 문 안쪽에서 문을 여는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무엇이 바깥에서 안으로 침입한다. 그렇게 이방인(=미지수x)인 마틸다가 레옹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톱니바퀴처럼 변수 없이 이어지던 일상에 균열이 간다. 독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반드시 깨지기 마련. 당연하게 흐르던 시간들이 구부러지기 시작한다. 이제 방정식은 본래 알고 있던 방법으로 풀리지 않는다.
뿌리 없이 사는 일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던 레옹이 토니의 명령 없이 자의로 사람을 죽이고 마틸다를 구하려 앞뒤 재지 않고 마약단속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무방비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코를 골고 잔다. 더 이상 레옹의 삶은 마틸다가 오기 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 그의 살인 행위는 이제 청소로 취급될 수 없으니, 그 자신의 욕망으로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청소하듯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해질 수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기며 존재감을 발한다. 레옹의 내부에서 움튼 욕망은 온갖 흔적을 남기며 그의 공적 영역을 침범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복수로 오염시킨다. 이제 그의 모든 행위는 아주 사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를 예감한 레옹은 토니에게 자기 돈의 처분에 대해 당부하며 마틸다를 보살펴 줄 것을 요청한다. 변화 앞에서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지 그는 알고 있다. 안락한 화분에서 벗어난 식물은 흙 아래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대신 거대한 자연 앞에 그대로 노출되는 위험을 부담해야 하기에.
It's my best friend. Always happy, no questions. It's like me, you see? No roots. If you really love it you should plant it in the middle of a park so it can have roots.
화분에 심긴 식물의 이파리를 정성스레 닦는 레옹의 모습을 보고 마틸다가 물었다. 그 식물을 정말 좋아하나 봐요? 레옹이 답한다. 내 절친이지. 항상 행복하고 질문하지 않아. 마치 나처럼, 뿌리가 없어. 이에 대한 마틸다의 대답. 정말 사랑한다면 공원에 심어줘야 해요.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애지중지하던 화분의 자리를 점점 더 마틸다가 점유한다. 레옹 곁에 있던 화분의 역할을 자연스레 마틸다가 대신한다. 화분은 레옹 자신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마틸다를 지시한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뿌리가 없는 열두 살의 소녀. 그녀에게는 부모가 있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결국은 죽어버린다. 게다가 처음부터 엄마라는 존재가 부재한다. 둘 모두 뿌리를 결여한 채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셈이다. 자궁을 잃었기에 자궁을 붙잡고 산다. 레옹은 우유만 마시며 자라기를 거부했고, 마틸다는 4살짜리 동생을 돌보며 스스로 엄마 되기를 자청했다. 전자가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면 후자는 스스로 자궁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여전히 뿌리는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그릇에 담긴 식물로 여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떡해야 할까? 정말 사랑한다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서로의 뿌리를 위해 레옹과 마틸다는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여하고 있는 자만이 타자의 결여가 눈에 들어보는 법이니.
레옹은 사랑하는 마틸다를 위해 스스로 대지가 되는 방식을 택한다. 그녀로 하여금 화분에서 벗어나 뿌리내릴 수 있도록 말이다. 이를 위해서 그가 먼저 자신을 둘러싼 화분을 깨야만 한다. 그러니 레옹은 그녀를 위해 복수를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곧 자신의 틀을 깨고 땅으로 나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옹에게 사랑은 언제나 복수와 겹쳐져 있다. 삶의 모습으로 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그것은 실은 죽음의 얼굴이었다.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된 순간 레옹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한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마틸다의 대지가 되어 그녀의 뿌리를 감싸고 있게 될 것을 안다. 살아남은 마틸다는 화분을 공원 한 켠에 심어줌으로써 레옹의 변신을 완성시킨다. 화분을 자신의 메타포로 삼았던 레옹은 마틸다에 의해 메타포 그 자체가 되었다. 그녀로 말미암아 그는 식물로 변신해 대지로 돌아갔다. 어쩌면 이 변신을 알고 있었기에 레옹은 그다지도 확신에 차 말하지 않았을까. 마틸다 너는 나를 잃지 않게 될 거라고. 우리는 함께 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남은 것은 거짓말 같은 진실과 예측 불가능한 미래. 상징계에 진입하기를 거부하며 스스로를 소외시킨 채 밖에 남아있던 마틸다는 제 발로 학교―완전히 법과 규칙으로 돌아가는 공간―로 돌아간다.
I think we'll be okay here, Leon.
레옹이 비로소 스탠스필드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폭발한다. 그리하여 사랑 아니면 죽음을 외치던 마틸다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통해 사랑과 복수를 모두 얻었다. 그녀는 사실 사랑을 잃지 않았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 생겼고 죽음을 각오했던 복수를 달성하고서 생존했다. 그리고 마침내 발 디딜 현실에 뿌리를 내릴 준비를 한다. 마틸다 곁에는 부모도, 레옹도, 아무도 없지만 그녀는 괜찮다. 이제 그 식물은 비바람 모두를 온몸으로 맞으며 세상에 뿌리내리고 하늘 위로 뻗어나갈 일만 남았다. 비록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더라도. 모든 것의 안과 밖을 허물며 경계 내부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소녀는 이제 틀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아주 사적인 비밀을 홀로 간직한 채. 모두가 알기 원하지 않았던 던 그 진실은 오직 그녀에게만 있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한낱 허구로, 현실에 없는 신화로만 취급되듯이 말이다. 그러나 레옹과 그와의 사랑은 분명 마틸다에게 유일무이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