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핵심은 창조주와 아담의 손이다. 서로를 향해 뻗은 채 아직 미처 닿지 않은 두 손가락은 이제 곧 닿을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예기된 접촉은 창조의 순간을 포착하고, 창조물은 두 손가락 사이의 틈새로부터 예감된다. 손은 접촉을 향하고 접촉은 창조의 영역으로 뻗어나간다. 이때 접촉이란 상처를 수반하기 마련이고, 서로 맞닿은 지점에서 어떤 파장이 생겨날지는 미지수다. 그러니 손에는 언제나 기회와 위험이 함께 잠재한다. 창조주 역시 아담을 창조하는 순간 그가 앞으로 무엇을 만지고 움켜쥘지는 알 수 없었을 테다. <파워 오브 도그>의 주인공 필(베네딕트 컴버비치)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맨손으로 만지고 잡고 쓰다듬은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게 될지 그는 몰랐을 것이다.
1925년, 필은 미국 몬태나주에 있는 부유한 목장을 동생 조지(제시 플리먼스)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미혼인 두 형제는 중년이 되도록 침실을 공유하는 사이다. 전형적인 카우보이이자 마초인 필은 유순하고 내성적인 조지를 뚱보라고 놀리며 조롱하지만, 자신의 시야 안에 없으면 불안해할 정도로 유난스럽게 동생을 챙긴다. 반면 조지는 거칠고 위압적인 데다 오만한 형을 불편해하며 필의 지나친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던 와중 조지가 레스토랑 주인인 미망인 로즈(키얼스틴 던스트)에게 반해 결혼을 강행한다. 필은 로즈를 자신들의 재산을 노린 꽃뱀이라 욕하며 강하게 분노하지만, 조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로즈를 집으로 들인다. 이에 필은 로즈를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하고, 로즈는 보이지 않는 필의 폭력 속에서 술과 함께 점차 시들어간다. 그때 의대에 다니던 로즈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맥피)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목장에 온다. 피터는 이미 레스토랑에서의 첫 만남에서 필로부터 '낸시 양'이라 불리며 모욕을 받은 바 있다. 종이로 섬세하게 만든 꽃을 어머니에게 선물하며 그녀의 행복을 최선의 의무로 여기는 피터가 필과 로즈 사이에 끼면서 균열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영화 속에서 필은 항상 맨손이다. 수말을 거세할 때나, 말가죽으로 밧줄을 엮을 때나, 들판에서 토끼를 잡을 때나, 언제든 맨손이다. 일을 하면서 생기는 이런저런 생채기에도, 피가 뚝뚝 흐를 정도의 상처에도, 그는 무관심하다. '남자'라면 당연히 맨손으로 과감하게 모든 일을 척척해내야 하니까. 필은 장갑을 끼지 않는다, 결코. 그런 한편 필은 가죽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그는 자신의 목장에서 나온 가죽을 다른 사람에게 일절 팔지 않는다. 남은 가죽은 쌓아뒀다가 불태울망정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는다. 그가 가죽을 사용하는 유일한 방식은 밧줄로 만드는 것이다. 정성스럽게 벗기고 말리고 자른 가죽으로 그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밧줄로 엮는다. 영화 속에서 밧줄은 두 가지 형태로 제시된다. 하나는 화재 시 사용하는 동아줄이고, 다른 하나는 카우보이들이 쓰는 로프다. 전자는 영화 도입부에서 조지와 필이 묵은 피터의 방(레스토랑) 창문 아래에 등장한다. 이 줄은 피터의 아버지가 자살할 때 목에 감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자의 경우 필이 손수 만들어 피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의 형태로 나온다. 영화는 갑작스러운 필의 죽음이 이 로프 때문임을 암시한다.
줄은 연결이다. 하지만 이것이 삶으로 이어질지, 죽음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접촉이 상처가 될지 온기가 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집안에 불이 났을 때 탈출하라고 둔 밧줄이 누군가의 목뼈를 부러뜨리고, 애정의 증표로 건네기 위해 엮은 밧줄이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은, 그러므로 뜻밖의 일이 아니다. 부여잡은 줄이 가닿는 곳이 어딜지 인간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럼에도 손을 뻗어서 잡고 만다. 구원 일지 나락 일지 알 수 없는 불확정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 그것 때문에 인간은 손을 뻗어 쥔다. 희망이건 절망이건, 맞닿지 않으면 아무것도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오만방자하고 어리석다.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 잡은 줄이 어디로 연결되는지 안다고 확신한다. 필의 맨손은 이런 (부질없는) 자기 확신과 자기기만을 증명한다. 필은 굳은살과 흉터로 자신의 어떤 부분을 은폐할 수 있고 상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늘 그렇듯 이 교만함은 누군가에게 들통나 처참히 무너진다. 필이 여느 때처럼 조심성 없이 손을 휘두르다 얻은 상처는 결국 감염되어 안으로 곪아가고, 그가 만든 밧줄은 결코 피터에게 닿지 않는다. 그 결과 필은 고집스레 착용하던 부츠와 작업복을 어쩔 수 없이 벗고 한사코 거부하던 구두와 정장을 입게 된다. 마치 자신의 장례식을 예고라도 하듯이.
필은 언제나 맨손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실상 나체(naked)가 아니기도 하다. 거칠고 투박한 그의 손은 그가 줄곧 내뿜는 과장된 사내다움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필의 맨손은 그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선 절대 벗지 않는 지저분하고 질긴 작업복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것은 정체성의 일부를 숨겨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온몸에 뒤집어쓴 마초 카우보이라는 대단히 두꺼운 껍질과 다름없다. 그러니까 그는 기실 '남성성'을 결핍하고 있는 셈이다. 가죽에 대한 필의 집착은 이 결핍으로부터 기인한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그의 애착은 브롱코 헨리라는 첫사랑에 대한 과한 찬양과 그리움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벌거벗은 채로 다른 남자 동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없다. 필의 알몸은 그가 몰래 감추고 있는 브롱코 헨리의 스카프처럼 간드러지고 유약한 까닭이다. 그리고 피터는 이 사실을 간파한다.
피터는 자신의 마르고 가냘픈 몸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낸시 양'이라 조롱당해도 그는 자신이 외적으로 약해 보이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필과 달리 피터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관해서 무관심하다. 피터는 감추거나 숨겨야 할 것이 없다. 그는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 곧 어머니를 행복하게 하는 일만을 조용히 해 나간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어떤 일이든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다. 토끼를 좋아하지만 외과의가 되기 위해 기꺼이 잡은 토끼의 배를 가르고,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 필에게 다가가 그의 호의를 얻기 위해 승마를 배우고 그와 단둘이 야영을 떠난다. 피터는 강하다. 어떤 낌새나 기색 없이 상황을 자신이 유도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이끌고, 언제 장갑을 껴야 하고 벗어야 하는지를 안다. 탄저병에 걸려 죽은 소의 사체에서 얻은 생가죽을 언제 어떻게 어떤 말과 함께 필에게 주어야 하는지 알듯이. 덫을 놓고 몸을 숙인 채 적절한 타이밍이 올 때까지 숨죽이는 수컷처럼. 이러한 피터의 날카로운 판단력과 단호한 결단력은 정확히 로즈와 대비된다. 필의 보이지 않는 감시 속에서 공포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쉽게 분별력을 잃고 술독으로 도피한다.
로즈는 영화 속에서 가장 이질적이다. 그녀는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어디에도 섞이지 못한다. 조지에겐 장신구이고 필에겐 방해꾼이며 피터에겐 지켜야 할 어머니다. '로즈'라는 이름처럼 그녀는 세 부류의 남성들―어리숙한 신사(남편), 여성 혐오자 마초(시형), 다정한 냉혈한(아들) 속 한 송이 꽃이다. 곧 시들어 버릴 것 같은 꽃.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는 존재. 아내 건 꽃뱀이건 어머니 건 그 어떤 역할도 로즈에겐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다. 부유한 목장을 경영하는 남편의 아내라기엔 사교성이 지나치게 없고, 남자의 돈을 노린 꽃뱀이라기엔 요령이나 매력이랄 게 거의 없으며, 성인 된 아들의 어머니라기엔 나사 하나가 빠진 듯 어딘가 모자란 느낌이다. 그럼에도 로즈는 여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세 남자가 각기 재현하는 남성성이 이 꽃 같이 가녀린 여인에 기대어 드러나기 때문이다.
로즈는 네 명의 인물 중 유일하게 예측이 되지 않는다. 이 면모는 필과 피터, 조지가 모두 집을 비운 때에 알코올에 절은 상태로 필의 가죽들을 인디언에게 모조리 팔아버린 행동에서 나타난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필에 대한 모종의 복수를 완료한 후 로즈는 인디언으로부터 얻은 자수가 놓인 가죽장갑 한 짝을 소중히 가슴에 껴안는다. 장갑의 보드라움에 볼을 비비며 눈을 떼지 못한다. 자신을 보호해 줄 어떤 것을 만난 듯이, 기대고 의지할 무언가가 생겼다는 듯이, 그래서 안심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필이 맨손을 아예 장갑화(化)하여 벗을 수 없게 된 경우라면, 로즈는 손에 낀 장갑마다 족족 벗겨져서 항상 맨손인 상태로 노출된 경우다. 손에 꼭 맞는 장갑을 항상 찾아다니지만 결코 갖지 못한다. 겨우 넣은 장갑은 손에서 미끄러져 빠지기 일쑤다. 그녀의 손은 벌거벗은 채다. 그래서 로즈는 위태롭고 불안하고 초조하다. 애써 손에 붙잡은 것을 잃어버릴까 늘 노심초사인 탓이다. 로즈는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가 벅차다. 어느 쪽에 있더라도 넘치거나 모자라서 어긋나고 만다. 허기는 채워지지 않고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영영.
필, 조지, 피터 세 남자 속에서 로즈는 시종 불편한 모양새로 존재한다. 그녀는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다. 어디에 있어도 제대로 환영받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없어선 안 된다. 세 사람이 각자의 역할, 그러니까 사내, 남편, 아들이란 역할을 하기 위해선 로즈가 있어야만 한다. 결국 '남자'란 '여자' 곁에서만 기능하는 셈이다. 그래서 로즈는 사라지지 않는다. 존 고든 박사나 필 버뱅크는 죽을 수 있지만 로즈는 그럴 수 없다. 로즈는 비존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기 자신은 결코 밟을 수 없는 자신의 그림자처럼. 꼭 붙어 있지만 끝내 닿을 수 없는.
<파워 오브 도그>는 미끄러지고 어긋나거나 삐걱거리며 닿을 듯 닿지 않는 접촉과 관계들에 관한 영화다. 여기서 각 인물들은 모두 부정교합처럼 이상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부딪힐 때마다 파열음이 퍼지고 상처와 생채기는 아물 새 없이 벌어지기만 한다. 치부를 가리기 위해 가면을 써도,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해도, 불안을 떨치기 위해 술을 마셔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치부와 일상과 불안은 계속 거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인간은 붙잡은 손을 혹은 끈을 놓지 않는다. 어쩌면 이 일그러지고 비틀린 접촉 속에서도 일말의 온기를 감지하기 때문이 아닐까. 피터가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탄저균이 득실거리는 생가죽을 맨손으로 만지는 필과 기꺼이 한 대의 담배를 나눠 태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남은 것은 신의 손에 넘겨야 한다. 한낱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이제 성경을 펼치고 다음의 구절을 읽으며 기도하는 일뿐일지도 모르겠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Deliver my soul from the sword; my darling from the power of the d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