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독백

<Shirley: Visions of Reality>

by 수자타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Shirley: Visions of Reality)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Chair car>(1965)를 배경으로 주인공 셜리가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들고 의자에 앉아 읽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감독은 <Chair car>를 영화의 처음과 끝에 놓고 1931년부터 시작하여 호퍼의 열두 점의 작품―<Hotel room>(1931), <Room in New York>(1932), <New York movie>(1939), <Office at night>(1940), <Hotel lobby>(1943), <Morning sun>(1952), <Sunlight on brownstones>(1956), <Western motel>(1957), <Excursion into philosophy>(1959), <A woman in the sun>(1961), <Intermission>(1963), <Sun in an empty room>(1963)―을 연대기별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각각의 작품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한 셜리의 독백을 중심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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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인 것으로 추측되는 셜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독백만 한다. 연극 대본을 읽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계속 말을 하지만 홀로 있거나 같이 있거나 대화다운 대화는 하지 않는다. 대화는 '너'를 향한다. 여기서 '너'는 들어주는 사람 곧 타인이다. 대화라 함은 이처럼 말하는 사람[나]과 듣는 사람[너]이 나뉘어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나 독백은 양자가 포개진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동일하다. 그것은 '나'의 밖에 있는 '너'가 아니라 '나' 안에 있는 '너'를 향한다. '나'와 '너'가 다른 공간이 아니라 한 공간에서 겹쳐질 때 인간은 동물의 범주에서 분리된다. 동물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인간은 왜 독백을 하는가?


라캉에 따르면 우리는 말을 하게 되는 순간 스스로로부터 소외된다. 내가 '나'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 말해지는 '나'와 말하는 '나'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 발화하는 '나'와 발화되는 '나'는 발화 순간 이미 일치하지 않는다. 이렇듯 언어는 우리 자신을 자기로부터 미끄러져 버리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근원적으로 소외된다. 타자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이다. 영화 속 셜리의 독백은 이러한 근원적 소외를 가리킨다. 마치 배역으로서의 셜리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셜리가 나뉘어 있듯이. 그러나 또한 연기하는 순간에 배역과 셜리는 포개져 있다. 이 둘은 포개져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이 불일치의 간극 사이에서 셜리는 독백한다. 그래서 영화는 시종일관 쓸쓸하고 지루하고 무겁고 심심하고 더디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 본래의 소외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런 한편 영화 속에 등장하는 호퍼의 열세 점의 작품은 모두 실내를 그리면서 문이나 창문이 꼭 있다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여기서 셜리는 독백을 마치거나 독백을 하면서 창문을 열고 닫거나 그것을 향해 서 있곤 한다. 마치 소외된 상태로 있는 사람이 자기만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어두컴컴한 실내에 창 밖으로부터 석양이 쏟아지거나 소리가 울려 들어온다. 희미하고 흐릿하지만 천천히 스며들어 소외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너'를 통해서다. '나'와 같이 소외된, 그래서 쓸쓸하고 고독하기 그지없는 '너'. 그리고 이 '너'는 '나'의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따로 또 같이 이미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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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사이의 화해는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손은 마주 보고 섰을 때에야 비로소 맞잡을 수 있다. 등을 맞대로 서 있는 상태로 악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이 첫 장면과 이어질 때 시작과 끝은 여기와 저기가 아니라 둘 모두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반복하는 줄 모른 채 같은 자리를 빙빙 맴돈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화해는 불가능하더라도 공존은 가능하다. '나'와 '너'는 각자의 자리를 배회하지만 사실은 교집합 속에 이미 "같이" 존재한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소외된 주체는 불안 속에서도 미치지 않는다. 그런 한편 만약 미쳐버린다면?


불안 속에서 안식을 찾은 사람을 미쳤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캉에 따르면 광인은 실재(Real)를 실제로 보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때 실재란 영원히 메꿀 수 없는 구멍으로 오브제 a로도 불린다.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욕망의 대상으로 남는 어떤 것인 실재는 언어로 인해 소외되기 이전의 주체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른바 '정상'은 실재를 생략된 것으로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 그럼에도 실재는 여러 다른 모습을 하고서 상징계[질서 or 법] 속으로 침투한다. 이때 실재가 다른 것으로 환유되지 않은 채 현현한 것을 보는 자를 광인이라 한다. 법이 부재한 곳에서 실재는 '제정신'인 인간을 집어삼키는데 이것을 미친 것이라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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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미치진 않더라도 상징계 곁을 유령처럼 떠도는 실재 때문에 주체는 시시때때로 멜랑꼴리 해진다. 거기에는 우울과 고독, 불안이 항상 함께 하며 소외 상태는 거듭 상기된다. 마치 "셜리"라는 제목 옆에 붙은 "Visions of Reality"라는 부제처럼 말이다. 영화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고독과 황량함의 공기부터 셜리의 독백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실재의 환유들로 가득하다. 우리 모두는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사실상 우리 모두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애초에 채워지지 않을 구멍을 떠안고 태어난다. 아무도 완벽하지 않다. 누구나 자궁에서 잉태하여 엄마의 두 다리 아래에서 나와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욕망 속에서 괴로워하며 때때로 웃고 산다. 본래 그러함을 받아들인다면 불안과 고독 속에서도 연대와 공존은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화해는 불가능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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