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래빗>(Jojo rabbit)
어른을 위한 전쟁 잔혹 동화 같은 영화였다. 어른은 아이로, 아이는 어른으로 뒤집힌 세상을 재치 있게 그렸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전쟁이란 모든 것을 뒤집어 거꾸로 만들어버리는 검은 요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영화 <조조 래빗>은 아이와 어른, 전쟁과 평화, 순수와 맹목 등 모든 이분법을 반전시킨다. 로맨스와 자유, 그리고 춤을 열망한 조조의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는 결국 교수형에 처해지지만, 10살의 소년 나치인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국가와 정치에 마음을 쏟아 붙다 끝내 생존한다. 어른아이는 죽고 애어른은 살아남았다. 편하게 웃어넘길 수 없는 영화 속 묵직한 조롱과 장난은 전쟁의 잔혹함을 어여쁜 동화로 탈바꿈시켰다.
나약한 토끼로 비유되는 조조는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닌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았다. 유머와 웃음을 잃은 아이는 언제나 진지하고 심각하다. 그래서 그는 나치가 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거짓 이야기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농담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죽은 척이 불가능하다.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웃음이 봉쇄된 공간은 위태롭고 불안하다. 열 살 먹은 아이가 칼을 들고 있는 장면에서 웃을 수 없는 이유는 아이들이 그것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조조와 동갑 친구인 요키(아치 예이츠)는 계속해서 조조에게 물음을 던진다. 확고한 믿음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조조에게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유대인들은 우리랑 똑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구분하지?"
물음표는 진지하고 심각한 현실에 균열을 일으킨다. 조조의 집에 숨은 유대인 엘사(토마신 맥켄지)를 만나면서(엄마 로지가 조조 몰래 숨겨줌) 그 금은 더 커지기 시작한다. 일곱 살 많은 엘사는 끊임없이 조조를 놀린다. 진담과 농담을 구분하지 못하는 조조는 시종일관 그 놀림에 걸려든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과 확신으로 지어진 조조만의 현실을 무너뜨리는 단초가 된다.
한편 어른들, 엄마 로지나 클렌첸도르프 대위(샘 록웰, 이하 대위) 같은 경우 계속해서 웃고 떠든다. 엄마는 웃음을, 대위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를 은유한다. 로지는 아들 조조에게 사랑과 웃음, 춤과 문학 등을 알려주려고 애쓴다. 자유와 상상력의 힘을 언젠가는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대위는 시종 술에 취해 있다. 이성이 작동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주지만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을 내린다. 웃음과 농담, 비이성·비합리적 상태 속 어른들이 결국은 애어른인 조조를 구원한다. 그리하여 릴케의 시를 읽게 만든 엘사와 함께 전쟁이 끝난 곳에서 서로 웃으며 몸을 흔든다.
그러니 전쟁이 웃음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웃음을 잃어버려 전쟁이 시작된 걸지도 모르겠다. 영화 <조조 래빗> 속 반전된 상황은 지금껏 당연하게 여겼던 전제들을 뒤집고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선사한다. 그리고 이 계기는 유쾌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