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짓>(Transit)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마르세유는 멕시코 혹은 미국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기약 없이 갇혀버린다. 고향을 잃고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로 이들은 마르세유에서 하염없이 부유한다. '난민' 혹은 '불법체류자'라 불리는 이들은 불법체류와 합법적 비자 사이에 끼인 채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목적지는 무한히 연기되고 생존 여부는 불명확하다. <트랜짓>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마치 유령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백하고 담담하게 그린다.
게오르그(프란츠 로고스키)는 파리에서 지인으로부터 바이델이라는 작가에게 두 통의 편지(아내의 편지와 멕시코 대사의 편지)를 전달할 것을 요청받는다. 작가를 찾아가지만 그는 이미 자살한 뒤였다. 작가의 유품을 챙겨 마르세유로 간신히 피신한 게오르그는 바이델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멕시코 대사관에 찾아간다. 거기에서 대사가 게오르그를 바이델로 오인하면서 그는 합법적인 비자를 가지고 멕시코로 갈 기회를 얻게 된다. 그렇게 게오르그는 동시에 바이델이 되고, 바이델의 아내인 마리(폴라 비어)를 만난다. 마리는 남편이 죽은 줄 모른 채 마르세유에서 계속 바이델을 기다린다.
죽은 바이델과 아내 마리, 마르세유에서 마리를 돌봐주던 리처드(고데하르트 기에세)와 게오르그까지 모두 불법체류자들이다. 유대인이기에 고향인 독일에서 도망친 것으로 유추되는 이들은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들을 한다. 게오르그는 살기 위해 바이델의 죽음을 숨기고 그가 된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그는 바이델의 유고를 읽으며 오랜만에 모국어를 읽는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오랜 도피 생활 속에서 게오르그는 외국어를 자신의 것인 양 써야 했다. 이렇듯 그들은 언어를 포함한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내가 '나'임을 숨기거나 부정해야 일말의 살 도리가 생긴다.
그런 한편 그들은 또한 생존이 아니라 존엄을 위한 선택을 한다. 죽음의 그늘 속에서 단지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 버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지키는 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이 필요하다. 유령이 되기 전의 '나'의 존재를 입증해야만 한다. 이 때문에 멕시코 대사관에서 비자를 얻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한다. 마치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이 없다는 듯이. 이들은 비자를 받기 위해 스스로를 과장하거나 지워야 할 것이고 운 좋게 비자를 받더라도 낯선 땅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야 할 운명이다. 비자를 받지 못하면 시체가 될 예정이고.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서성인다. 이 영화도 게오르그에 의해서가 아니라 게오르그의 이야기를 들은 나레이터를 통해 진행된다. 영화에서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던 게오르그도 결국 마지막에는 누군가(게오르그가 자주 가던 카페 사장)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 셈이다.
마리가 마르세유를 떠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포기한 채 남편을 기다린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그녀'임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존재가 곧 남편 바이델이다. 바이델 없이 마리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가 없다. 가령 바이델의 시체에서 그가 그임을 증명할 물건들이 모조리 게오르그가 가져가 더 이상 그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게오르그가 바이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이델을 증명할 서류와 물건들을 모두 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리는 반드시 바이델이 있어야 한다. 다른 방식의 생존이 아니라 그녀가 '그녀'임을 지킬 수 있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미 죽은 바이델은 마리와 게오르그 덕분에 죽지 않았다. 물질적으로는 죽었으나 상징적으로 바이델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의 죽음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인 게오르그가 그 사실을 숨김으로써 그는 죽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바이델의 얼굴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아내 마리. 그녀의 삶 속에 작가로서, 남편으로서의 바이델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두 사람을 통해 바이델은 바로 그가 '그'인 방식으로 잊히지 않고 기억된다. 그러니 마르세유를 떠나지 못하고 갇혀버린 수많은 도피자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물리적 의미의 죽음이 아닐 것이다.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는 것, 내가 '나'로서 있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것. 이 상징적 죽음이 무엇보다 끔찍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래서 게오르그는 끝내 마리와 함께 배에 오르지 못했던 것 같다. 어떤 진실은 누군가에게 지독히 잔인한 현실이 된다. 너무 잔인해서 그의 존엄을 무참히 뭉개버린다. 게오르그가 바이델로 위장하고 있다는, 말해지지 않은 사실이 마리에게는 바로 그러한 진실이다. 그러니 게오르그는 살 기회를 놓아야만 했을 것이다.
영화 중간에, 게오르그를 작가 바이델로 여긴 멕시코 대사는 그에게 왜 더 글을 쓰지 않냐고 묻는다. 비참하고 반인륜적인 역사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그것을 글로 남겨야 하지 않느냐고. 이에 게오르그는 어릴 적 글짓기 숙제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휴가나 방학, 명절을 보내고 나면 꼭 그것에 관한 글짓기를 해야 하는 숙제가 있었는데, 그걸 계속하다 보니 어느 날 글짓기를 하기 위해 휴가를 보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이다. 자신의 어떤 시간이, 혹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 한낱 글짓기를 위한 소재에 불과해지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있을까.
역사 속에서 인간 개개인의 삶은 거대 서사 속으로 수렴되어버리기 일쑤다. 모두의 사연이 다른데 역사는 그것을 한 가지로 모조리 삼켜버린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학살 속에서 사람들이 살기 위해 혹은 존엄을 지키기 위해 했을 선택은 모두 다르다. 게오르그와 마리가 했던 선택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역사는 그 선택들을 모두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으로 흡수해 버린다. <트랜짓>은 이렇듯 역사가 소거하고 생략한 이야기들에 귀 기울인 영화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