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목숨

<블랙 호크 다운>(Black Hawk Down)

by 수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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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미국은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 장군의 제거를 목표로 윌리엄 개리슨(샘 셰퍼드) 장군 휘하에 델타 포스와 레이저 부대와 제160 특수 공군 병력을 소말리아 모가디슈로 투입했다. 이름하야 "Operation Gothic Serpent".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은 이 실제 작전을 모티브로 한다.


작전은 간결했다. 미군이 아이디드 장군의 최측근들이 있는 건물을 습격하여 그들을 생포한 뒤 철수한다. 이 모든 과정은 30분 내로 끝낸다. 그러나 당연히 실전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제 갓 입소한 18세 토드 블랙번(올랜도 블룸) 일병이 헬기에서 줄을 놓치는 바람에 떨어지고 이를 시작으로 예상 밖의 일은 줄줄이 터진다. 슈퍼 61(블랙 호크) 헬기가 소말리아 민병대가 쏜 로켓에 맞아 추락하고 그 추락 지로 날아가던 슈퍼 64 헬기마저 피격된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30분 내에 작전을 마치고 철수하려던 작전은 18시간 후인 다음날 새벽 UN 평화유지군의 지원을 받고서야 마무리된다. 미군 18명이 죽고 73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천 명 이상의 소말리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딕 서펀트 작전은 엄청난 피해를 낸 실패한 작전이다. 영화는 왜 이 작전이 실패하고 말았는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소말리아 내전에 참전한 미군 정예 병사 개개인을 따라간다. 시각, 청각 모두 각각의 인물을 중심으로 직조된다. 그리하여 전쟁이 정치적 대립 같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피가 튀고 살점이 뜯기는 실재적 감각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150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 내내 영화 어디에도 아이디드 장군이나 워싱턴의 누군가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좀비처럼 몰려들어 픽픽 쓰러지는 소말리아 민병대원들과 손가락이 잘리고 배에 로켓이 박혀 죽는 미군들만이 낭자하다. 전쟁은 장막 뒤의 누군가들에 의해 시작되지만 피는 거리에서 흘린다. 군복을 입었건 입지 않았건 피 흘리는 모두는 거리에 존재하지 보고서나 명령이 흘러나오는 통신 장비 속에 있지 않다. 그러니 물을 수밖에 없다. 피 흘리는 자들에게 왜 거기에 가느냐고, 거기에 서 있느냐고.


# scene 1

A: 날 잡아들이면 장군이 항복할 것 같소? 순순히 따를 것 같소?
G: 그의 거처를 알잖소. 군자금도 대고 있고. 그를 잡기 전에는 안 떠나요. 결국 잡게 될 거요.
A: 없이 자랐다고 나를 우습게 보지 마시오. 나도 역사에 대해선 좀 알죠. 이 모든 것은 단지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요. 아칸소 출신의 백인 소년들이 간섭하지 않는 미래 말이요.
G: 정치엔 관심 없소(I wouldn't know about that). 난 텍사스 출신이요.
A: 개리슨 장군, 여기 온 건 실수요. 이건 내전이요. 우리의 전쟁이지 당신네 전쟁이 아니오.
G: 30만 명이 죽었소. 이건 전쟁이 아니라 학살(genocide)이오.


<블랙 호크 다운>에서 소말리아인에게 발언권이 주어지는 장면은 초반부에 한 번, 후반부에 한 번, 이렇게 딱 두 번이다. (이 두 장면 외에 소말리아인들의 음성은 그저 배경음으로 휘발될 뿐이다.) 위의 대화는 영화 초반부, 고딕 서펀트 작전을 시행하기에 앞서 개리슨 장군(G)이 아이디드 쪽에 무리를 공급하는 무기상인 오스만 아토(조지 해리스, A)를 체포한 직후 둘 사이에 오간 것이다. 아토는 쿠바산 시가를, 개리슨 장군은 마이애미 시가를 각각 물고서.


개리슨 장군의 대답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이 소말리아 내전에 참전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소말리아에서 벌어진 학살 때문이다. 수년간 지속된 부족 간의 전쟁으로 30만 명이 아사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지도자라는 아이디드 장군은 국제기구에서 지원하는 식량을 무기로 삼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골몰했다. 미국은 그를 제거함으로써 소말리아의 식량 보급을 원활히 하고 나아가 사회 질서를 복구한다는 명분으로 소말리아 내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아토는 역사를 지목하며 이 같은 명분은 대외용일 뿐이지 결국은 내정 간섭이 주목적이라고 꼬집는다. 이에 개리슨 장군은 정치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고 단번에 선을 긋는다.


개리슨 장군은 시종 워싱턴에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한다. 영화 속에서 유령의 그림자처럼 그려지는 윗선이 어떤 압박을 하건 그는 자기 할 일을 하려고 한다. 추락한 헬기 안에 혹시나 생존한 병사가 있진 않은지 확인하고 사망한 병사가 낯선 땅에 남겨지진 않을지 염려하는 것은 그래서다. 죽었건 다쳤건 모두 집(home)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그게 당연하니까. 그러기 위해선 누가 뭐라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개리슨 장군이 "한 명도 빠짐없이 복귀한다"(No one gets left behind),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라"(Do what you have to do)와 같은 명령을 반복하는 이유다. 따라서 30만 명의 죽음을 학살이라 명명하며 분노하는 그의 모습은 진심 어리다. 개리슨 장군은 정치와 상관없이 어떤 무고한 죽음에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소말리아까지 갔을 것이다.


# scene 2

D: 원하는 게 뭐지?
F: 인질로 잡힌 동료들과 널 바꿀 거야.
D: 정부가 응하지 않을 거야.
F: 그럼 너와 내가 협상하지. 군인 대 군인으로 말이야.
D: 내겐 권한이 없어(I'm not in charge).
F: 당연히 없겠지. 너는 죽일 권한(power)만 부여받았겠지, 협상이 아니라. 소말리아에선 살생이 협상이니까. 아이디드 장군을 붙잡으면 우리가 곧바로 무기를 버리고 미국 민주주의를 따를 거라고 생각하나? 살생(killing)도 끝나고? 우리도 알고 있어. 승리 없인 평화도 없다는 걸. 그러니까 살생은 항상 있을 거야. 그게 우리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지(This is how things are in our world).


마이클 듀란트(론 엘다드, D) 준위는 슈퍼 64 헬기의 조종사로 헬기가 격추된 뒤 포로로 잡힌다. 위 내용은 영화 후반부, 듀란트 준위와 그를 인질로 잡은 아이디드의 측근인 피림비(트레바 에틴, F) 사이에 오간 대화다. 앞서 아토 즉 아이디드 측이 인질이었던 반면 여기선 미군이 인질이다. 개리슨 장군이 의자에 앉은 아토를 내려다보며 선 자세로 심문을 했던 것과 달리, 듀란트 준위는 부상으로 몸을 가누지 못해 침대에 누운 채 피림비의 시선 아래서 심문을 받는다. 그리고 피림비는 시가가 아닌 담배를 물고, 듀란트는 피림비가 건네는 담배를 거절한다. 개리슨 장군이 아토가 건네는 쿠바산 시가를 거절했듯. 그러나 뒤바뀐 관계만큼이나 피림비와 듀란트의 대화는 개리슨 장군과 아토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계급장 뗀 버전이랄까.


아토가 "역사" 혹은 "아칸소 출신의 백인 소년들" 같은 유머를 곁들여 고상하게 미국을 비난했다면, 피림비는 미국이 소말리아에서 하는 행태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피림비의 말은 날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입으로 전쟁하는 자들의 말이 아니라, 총 맞는 자 옆에서 서서 총을 쏘는 자의 말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듀란트 준위에게 제안한다. "군인 대 군인"으로 둘이서 협상을 하자고. 이에 대한 듀란트 준위의 대답은 한없이 빈약하다. "I'm not in change." 직역하면 내 담당이 아니다. 그러니까 협상은 내 일이 아니다. 즉 내 책임이 아니므로 나에겐 협상할 권한이 없다. 그러나 피림비는 살생이 곧 협상이라고 응대한다. 미국이 소말리아를 대하는 방식 자체가 애초에 협상과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소말리아에선 죽일 권력을 부여받은 자들(외부에서건 내부에서건)에 의한 죽임/죽음이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이곳의 역사고 현재며 미래라는 게 피림비의 자조 섞인 결론이다.


협상할 권한을 가진 유일한 입장(정부)을 제쳐두고, 사람 대 사람으로 전쟁의 양측이 대립할 때 남는 것은 뭘까? 상처투성이인 두 몸뚱이뿐이지 않을까? 승리 없이는 평화도 없다는 말은, 단지 소말리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자신의 승리를 위해 싸우지 않나. 각자가 각자의 승리를 위해서만 움직일 때, 당연히 죽임/죽음은 지속된다. 그러니 전쟁은 끝날 리가 없다. 평화는 지연되고 오직 망가진 육신들만이 연기된 시간 틈을 차곡차곡 채운다. 그러니 첫 질문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왜 전쟁에 나가 싸우는가? 무엇을 위해 피 흘리는가?


# scene 3

E: 다시 가려고요?
H: 대원들이 남아있어. 빌어먹을. 고향(home)에 돌아가면 사람들이 물어. "그 짓을 왜 해, 후트? 왜? 전쟁 중독(war junkie) 뭐 그런 거야?" 난 한 마디도 대꾸 안 해. 왜냐고? 이해를 못 하거든. 왜 우리가 그 짓을 하는지 그 사람들은 이해 못 해. 우리가 싸우는 건 바로 옆에 있는 전우들(the men next to you) 때문이란 걸 이해하지 못해. 그리고 그게 다야. 그게 전부지(That's all it is).


맷 에버스만(조쉬 하트넷, E) 하사와 놈 후트 깁슨(에릭 바나, H) 중사는 함께 18시간 만에 구사일생으로 돌아왔다.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트 중사는 다시 전장에 나갈 채비를 한다. 이를 보고 에버스만 하사가 묻는다. 마치 어떻게 그 지옥 같은 곳에 다시 들어가느냐는 듯이. 후트 중사는 "네 옆에 있는 사람"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는 애초에 미군이 소말리아에 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트 중사는 전쟁터에 자원해서 왔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거기에 있을 거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누군가는 총알을 피하거나 맞으며 피 흘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이걸 "전우애"라고 한다.


그러니까 결국 사람이다.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장에 나가는 이유는 곁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것은 이해의 범주 속에 있지 않다.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생존자가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한 데다 그 상황에서 적진에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헬기에서 내려 추락 지로 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 거기에 사람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군인의 시체를 이송하기 위해 부대 전체가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 그것이 죽은 자와 그의 가족에 대한 예의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해'와는 관계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전쟁이니까. 후트 중사는 동료의 죽음을 자책하는 에버스만 하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H: 생각하지 마. 자네 능력 밖의 일이니까. 누가 총에 맞고 누가 아닐지는 자네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누가 헬기에서 떨어지건, 왜 하필 그런지건, 그건 자네 탓이 아냐. 전쟁일 뿐이지(It's just war).


그게 전쟁이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고, 그래서 누군가가 죽는 게 당연하고, 예측 불가능한 일이 여기저기서 터져서, 뜻대로 수습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곳. 피와 살점, 시체와 탄피가 즐비한 것이 자연스러운 공간. 그래서 전쟁 '영웅'은 생각처럼 그다지 멋지지 않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영웅'은 전쟁 속에 있지 않다.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은 전쟁 어디에도 '영웅'의 '멋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그 속에서 영웅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군인 모두는 어떤 모먼트에서 다 영웅이 된다. 어떤 선택, 이성이 작동할 수 없는, 그래서 할 수밖에 없고 하고야 마는 선택들이 그들을 결국은 영웅이게끔 한다. 이것은 거창한 대의나 이상적인 정의감 같은 게 아니다. 살과 살이 맞닿은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네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건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지각일 테다. 전쟁 속에서도 삶에 대한 감각은 지워지거나 잊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게 전부다."


# scene 4


전쟁은 죽은 자에게만 끝나니, 싸우는 자의 몫은 옆에 있는 누군가를 지키는 것뿐 일 테다. 전쟁 속에선,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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