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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 닥터오 Dec 19. 2020

시애틀, 너를 어떻게 하면 좋니 2

얼마나 더 많이 베풀어야 할까?


반찬이 없어지다니!

아까 배달원이 배달했을 시점에 현관 카메라로 확인했을 때는 분명히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저장된 영상 파일들을 확인했다.

11:06 반찬 가게 배달원이 반찬이 든 종이가방을 두고 사라진다.(Cam #1)

12:01 낯선 남자의 등장. 내 반찬을 들고 냅다 튄다.(Cam #2)


Cam #1


Cam #2



뭐지?

처음 보는 이 백인 남자는 누구야?

30대로 보이는 깡마른 남자가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턱스크를 한채, 담배를 뻐끔거리며 내 반찬에 코를 처박고 뭔가를 확인하더니 반찬을 들고 재빨리 가버린다.


카메라에 찍힌 그의 걸음걸이와 뒷모습은 나 이거 처음 해봐,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정쩡한 그의 절도가 그대로 찍혔다. 이 집에 3년을 살면서 한 번도 배달된 물건이 도난당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저 백인 X이 처음 기록을 쓰고 갔다. 배달된 지 한 시간 만에 반찬이 털려 버렸다.


바로 반찬을 들여놓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후회했다. 돈도 아깝고 반찬도 아까웠다. 이번 주를 책임져 줄 나의 육의 양식인데. 하나님, 대체 왜 내 반찬을 가져가셨나요?라고 화도 내봤지만, 무슨 소용이랴! 스키니 진이 헐렁한 걸 보니 피죽도 못 얻어먹었나, 그게 아니라면 마약에 중독되어 마약 귀신에게 영양분을 다 빨려 버렸나. 가져간 내 반찬이라도 먹고 살이라도 찐다면 그나마 다행이리라.


어제 주문한 반찬들은 고등어 무조림 2, 소고기 육개장 2, 미역국 2, 깻잎 김치, 도토리묵, 브로콜리, 숙주나물, 계란말이였다. 많이도 했다. 과연 그가 이 토종 한국 음식들을 잘 먹을 수 있을지. 나 대신이라도 잘 먹어 준다면 마음이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신을 주워 담고 전화를 걸어 다시 반찬을 주문했다. 고등어 무조림과, 육개장은 뺐다. 가격과 사이즈 때문에라도 다시 시킬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리고 사장님에게는 도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다들 힘든데, 굳이 말해서 뭐하랴 싶기도 하고, 아파서 힘도 없고, 여러모로 기운이 달리는 하루였다. 그 백인 X도 코로나 때문에 삶이 힘들겠지. 이해하고 넘어가자.  


오후 4시쯤 되었을까? 전화 한 통이 왔다. 반찬가게 사장님이었다.

“오늘 반찬 받으셨어요?”

“아니, 그게 오늘 온 반찬을 바로 안 들여놨더니 누가 와서 가져가 버렸네요. 하하! 그런데 어떻게 아시고 전화하셨어요?”

“제가 인별 그램으로 DM을 받았는데, 사모님네 주소가 찍힌 반찬 가방이 자기네 집 앞에 놓여 있고, 자기네 아마존 소포가 사그리 사라졌다네요. 그러면서 우리 손님이 반찬을 자기네 집 앞에 두고 아마존 소포를 가져간 게 아니냐며 따지듯이 메시지가 왔네요. 제가 말이 안 된다고 했죠. 사진도 보내왔는데 반찬 가방 안에 여러 개가 빠져 있던데요.

“하하! 그러게요. 거기 제 이름이랑 주소가 다 있는데 제가 왜 반찬이랑 아마존 물건을 바꿔치기했을까요? 보안 캠에 찍힌 거 보내드릴게요. 필요하시면 그분에게도 보내주세요.”


반찬 가게 사장님은 보안 캠 영상을 그 사람에게는 안 보내는 게 좋다고 했다. 혹시 그 사람이 반찬을 가져가고 혹시 자기네들을 신고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확인차 메시지를 보낸 것 같다며. 반찬 가방 안에 전화번호도 있었는데 전화 대신 SNS를 통해서 DM을 보낸 걸 보면 조금 수상하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경찰이 아니면 굳이 그 사람에게 보낼 이유가 없겠지.(오늘 알게 된 사실; 시애틀 지역은 900불 이하의 물건 도난은 사건 접수도 안 된다고 한다. 실화냐?)

사장님은 반찬을 다시 보내주신다고 하셨다. 참 착하기도 하셔라. 이미 다시 주문했다고 하며 한사코 사양했지만, 저녁에 남편이 픽업해서 들고 온 반찬들 사이에는 내가 주문하지 않은 고등어조림도 함께였다. 새로 주문한 반찬값은 받지 않으셨다.

기분이 묘한 하루였다. 좋지 않은 몸으로 확인한 시애틀의 민낯을 알게 된 날, 실제로 그 민낯을 몸소 체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애틀의 기운이 내가 사는 동네까지 슬슬 내려오는구나, 생각했지만, 잃어버리고 말 반찬이 또 희한한 방법으로 행방을 알렸고, 반찬들은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을 품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어차피 이렇게 다시 돌아올 것을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생각했다. 혹시 내가 올해 더 나누고 더 베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올해 내가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렸나? 뒤돌아 보게 됐다.


반찬 값을 사장님이 받지 않았더라도 반찬값은 얼마 되지 않는다. 반찬 값만큼만 더 베풀어야 한다면, 백번이라도 베풀 수 있겠다. 하지만, 얼마나 더 베풀고 더 나누어야 할까?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을 더 나누어야 할까? 내가 더 베푼다면, 시애틀도, 세상도 조금은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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