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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행복의 기원-서은국

by 성새진


“습관의 뜰을 지나 이성의 궁전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을 축약할 수 있는 한 문장이다. 사실 고등학생 때 윤리 선생님이 매일 쪽지시험을 보며 철학자들의 사상을 외우게 했는데(여담이지만 아주 탁월한 교수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외웠던 사상들 중 가장 기억의 남는 문장 중 하나였다.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습관을 통해서 덕을 쌓고, 이성을 통해 진정으로 좋은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시 십 대의 나는 그 설명을 오오~ 하며 들었고, 삼십 대의 나도 가끔 이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오오~하고 있었다. 대체로 이 문장에 동의하며 살았다는 뜻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은 한마디로 인간의 행복을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본 책이다. 지와 덕, 그 무엇도 행복의 베이스가 되지 못한다. 행복은 단지 인간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십 년을 넘게 고개를 끄덕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이야기다. 사실 일전에 <이기적 유전자>를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의 주장이 참신하긴 하지만 너무 도발적으로 보였을 것 같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인간은 유전자를 전승하기 위한 운반자이자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동의한 탓인지, 이 책이 정말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것은 행복을 단순화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행복을 정말 거창하게 생각한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우리 사회에서 왜 유행했겠는가. 그동안은 소소한 일상 정도는 행복으로 느끼지 못했으니까 2020년대에나 유행이 된 것이다. 이 책은 딱 잘라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p.127), “행복은 숭고한 인생 미션이 아니다.”(p.209)라고 말한다. 왜? 자주 행복하다는 것은 쾌락을 자주 느낀다는 것이고, 쾌락이란 생존을 위해 설계된 경험이므로 이는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행복은 생각보다 더 단순해진다. 행복은 자주 즐거운 것이다. 그리고 자주 신나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100을 행복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린다 해도 100의 행복을 똑같이 느끼지 못한다. 게다가 100의 행복이 1회 온다면 그건 1회의 행복일 뿐이다. 대신 1의 행복이 100회 온다면 그건 100회의 행복인 것이다. 저자는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행복 압정”을 곳곳에 깔아 두라 말한다. 아주 자그마한 행복 압정이라도, 그것을 밟을 때마다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행복 압정은 무엇일까. 저자는 “행복의 핵심을 사진 한 장에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중략)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p.195)라고 했다. 나도 유전자 운반 기계와 다름없는지라 나의 행복 압정의 대부분도 그와 같다. 아, 최근 새로운 행복 압정이 생겼다. 바로 거실에 둔 테이블이다. 얼마 전 거실에 붙박이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잘 사용하지 않아 늘 거슬렸던 소파와 TV를 치우기로 결심하고 단숨에 미션을 클리어했다. 대신 그 자리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고, 식사도 할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을 놓았다. 잘 어울리는 의자도 구비했다. 그제야 필연적으로 드나들 수밖에 없는 공간이 전부 나의 것이 된 기분이 들었다. 테이블 위에 책, 노트북, 예쁜 조명, 귀여운 소품, 화병을 두었다. 그렇게 거실이라는 공간, 테이블의 존재 자체, 테이블 위 나의 취향들, 테이블에 앉아서 하는 나의 모든 움직임까지도 나에게는 행복 압정이 되었다.


‘행복이 별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렴 별거지.’라고 자문자답하게 되는 날들이 있었다. 이전에는 크고 화려한 것만을 좇느라 ‘별것’이 되었던 행복이, 이제는 나의 일상을 행복으로 치환될 수 있게 하는 함숫값이 되었으므로 ‘별것’으로 느껴진다. 살아있는 한, 행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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