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핫플 동묘에서 관우를 만나다
5월의 마지막 날, 무슨 일인지 오늘은 점심을 거르고 그저 걷고 싶었습니다. 대학교 시절, 청량리에서 신촌까지 왕복하는 버스를 타고 다닐 때마다 늘 지나치던 곳이 하나 있었죠. 바로 동묘였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핫플’이란 말이 어울리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어르신들만 드나들던 중고시장, 그리고 늘 버스가 막히던 도로. 저에게 동묘는 그저 그런 풍경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습니다. 동묘는 이제 인스타그램 속 힙한 거리로, 빈티지 감성과 구제 쇼핑을 즐기려는 젊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간이 되었죠. 그런 변화 속에서도 저에게 동묘는 언제나 ‘그 사당 앞을 지나치기만 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왜 한 번도 안 들어가 봤을까?” 그런 의문이 문득 들었고, 오늘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짧게 산책 겸 다녀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왕복 1시간이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저는 동묘의 문턱을 처음으로 넘어보았습니다.
사실 제가 역사에 관심을 갖기 전까지만 해도, 동묘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습니다. 종묘처럼 조선 시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겠거니 막연히 생각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동묘는, 제가 좋아하는 삼국지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관우를 모신 사당이었습니다.
관우는 어떤 장수였을까?
일단 이 사당의 주인공인 관우가 누구인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관우는 삼국지연의 소설에서 유비, 장비와 함께 도원결의를 맺고 형제처럼 의를 나눈 인물입니다. 자는 운장, 별명은 미염공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름다운 수염을 가진 공’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는 그가 길고 멋진 수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죠.
관우는 충성과 의리의 상징으로, 무예도 뛰어났고 성품도 강직했습니다. 그저 소설 속 인물로만 기억되기엔 아까울 만큼, 실제 정사(正史)인 『삼국지』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당시 하북을 장악하고 있던 원소 진영의 핵심 장수였던 안량(顔良)을 단칼에 베어 조조 진영에 큰 공을 세웠던 사건이 유명하죠. 이 무공으로 관우는 조조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그 후 관우는 유비를 따라다니며 각지에서 전투를 치렀고, 결국 유비가 촉한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핵심 장수로 자리매김합니다. 그 존재 자체가 촉나라의 기둥 같은 인물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삼국지 팬들 사이에선 말 그대로 ‘의(義)의 화신’처럼 여겨지는 인물인데요, 그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오관육참(다섯 관문에서 여섯 명을 벤다)입니다. 조조 진영에 잠시 몸을 의탁했던 관우는, 유비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자 조조가 내린 관직과 예물을 모두 내려놓고 유비의 가족들을 데리고 떠나죠. 그러면서 다섯 개의 관문을 지나며 여섯 명의 장수를 베고 무사히 빠져나옵니다. 단지 주군을 향한 충성심만으로 이런 결단을 내린다는 것, 지금 봐도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관우 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게 있죠. 바로 청룡언월도. 소설 속 묘사에 따르면 이 무기는 무게가 82근, 그러니까 약 49kg에 달하고 길이는 1.2미터가 넘습니다. 물론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이야기 속 상징이 강하긴 하지만, 어쨌든 관우의 위용을 표현하는 데는 이보다 더 적절한 장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 거대한 무기를 휘두르며 싸우는 모습이 사람들 머릿속에 깊이 박힌 거죠.
이런 관우는 훗날 무신으로 신격화되어 ‘관성제군’이라 불리며,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에서도 널리 숭배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 관우를 모신 사당이 서울 한복판에 있다는 것, 참 묘한 기분이 듭니다.
왜 중국의 영웅 관우의 사당이 대한민국 한복판에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관우가 중국 사람인데, 왜 그의 사당이 대한민국,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걸까요?
이 이야기는 임진왜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명은 병력을 파병해 조선을 도왔습니다. 당시 명나라 군사들 중에는 관우를 무신으로 믿고 따르는 병사들이 많았는데, 실제 전장에서 “관우의 영이 우리를 지켜주었다”는 이야기가 퍼질 정도로 그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다고 합니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 측에서 조선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 즉 관왕묘(關王廟)를 세워달라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조선은 외교적 예우 차원에서 이를 수락하고, 1599년 착공에 들어가 1601년, 지금의 동묘 자리에 사당을 완공하게 됩니다. 명나라 황제 만력제가 직접 ‘관왕묘’라는 친필 현판까지 하사했다고 하니, 단순한 종교 공간이라기보다는 조선과 명나라의 우호와 외교의 상징물로 볼 수 있는 장소였던 셈입니다.
원래는 서울 곳곳에 관왕묘가 더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곳은 이곳 ‘동묘’ 단 한 곳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지요.
조선의 수도 한복판에, 그것도 400년 넘게 관우를 모신 사당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건,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의 세계가 단순한 중국의 전설을 넘어서서 한반도의 역사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줍니다.
동묘 둘러보기
동묘를 둘러싸고 있는 구제시장을 지나면, ‘동묘’라는 글자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정문, 외삼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곧이어 중문인 내삼문이 나오고, 그 너머로는 금빛 투구를 쓴 황금 관우상이 모셔져 있는 정전(본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사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건축 양식입니다. 일반적인 조선 시대 사당과는 다르게, 명나라의 요청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보니 중국식 건축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붕의 구조나 내부 장식에서도 중국식 색채와 조선의 전통이 절충된 흔적이 느껴집니다.
정전 안으로 들어서면 관우상을 중심으로 좌우 벽에 두 개의 사자성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만고충심(萬古忠心)’, 그리고 ‘천추의기(千秋義氣)’입니다.
‘만고충심’은 ‘영원히 변치 않을 충성스러운 마음’이라는 뜻이고, ‘천추의기’는 ‘천 년을 두고도 잊히지 않을 의로운 기개’라는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 의리의 화신인 관우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겠죠.
정전의 한가운데는 황금빛으로 된 관우상이 놓여 있습니다. ‘미염공(美髥公)’이라는 그의 별명답게 길게 늘어진 수염이 매우 인상적으로 조각되어 있었고,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는 얼굴은 살아생전 그가 보여줬던 무공, 의리, 충절의 기세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관우상 앞에는 그를 호위하듯 네 명의 수하 장수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항상 관우 사당을 방문할 때마다 관평과 주창은 익숙했지만, 나머지 두 명은 늘 궁금했었습니다. 이번에는 사전에 조금 더 찾아보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왕보(王甫)와 조루(趙累)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간략히 이 인물들을 삼국지연의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관평은 관우의 양자로, 아버지를 따라 수많은 전장에서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관우가 번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위나라와 오나라의 협공으로 인해 패전하여 맥성(麥城)에서 퇴각하던 중 함께 도주하다 오나라 군에 잡혀 관우와 함께 처형됩니다.
주창은 본래 황건적 출신이었으나, 관우의 의로움과 무예에 감복하여 투항한 뒤 평생을 따라다닌 충직한 장수입니다. 다양한 매체에서 청룡언월도를 대신 들고 다니는 이미지로 자주 묘사되며, 실제로 동묘에서도 관우상 옆에 청룡언월도를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는 맥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관우의 죽음을 전해 듣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고 전해집니다.
왕보는 주창과 함께 맥성을 방어하던 장수로, 관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성벽에서 몸을 던져 자결했다고 『삼국지연의』는 전하고 있습니다. 다만 정사 『삼국지』에는 그가 맥성에서 죽었다는 기록은 없고 이릉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것으로 나옵니다.
조루는 관우와 관평이 탈출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매복군에 대항해 싸우다, 오나라 장수 주연(朱然)에게 전사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어쨌든 이 네 인물 모두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최후를 함께한 충직한 장수들로 그려지며, 그런 이유로 중국이든 한국이든 관우 사당에는 항상 이 네 장수가 관우상을 호위하듯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짧은 점심시간을 내어 찾은 동묘였지만, 생각보다 많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서울 한복판, 낡은 시장 골목 뒤편에 자리한 이 작은 사당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삼국지의 이야기가 겹쳐진 역사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정전 안 관우상과 그를 둘러싼 장수들의 모습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의리의 상징처럼 다가왔고, 분주한 시장 밖과는 달리 고요한 사당 안은 오히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습니다.
잠시의 산책이었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주변에도, 무심코 지나치던 곳에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은 장소가 있지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