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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Jun 28. 2021

직장 상사와 같이 살라구요?

그것도 시골에서?

말끔한 셔츠 위에 사원증을 두르고, 한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채 빌딩 숲 속에서 산책하며 점심시간 여유를 즐기는 모습. 역세권 오피스텔에 나만의 공간을 꾸리고 퇴근 후 취미생활을 즐기는 사회 초년생.


취업 전까지 내가 상상하던 직장인의 이미지다. 대학교에 입학해 하나 둘 나이를 먹어가며 나의 상상은 현실과 괴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공대 출신이 갈 수 있는 회사들은 도회지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서울 중심지에 본사가 있는 건설사를 제외하고는 열이면 여덟 정도가 회사의 생산라인, 연구소, 또는 지방으로 취직을 했다. 나도 취업하게 되면 선배, 동기들과 비슷한 미래를 맞이하겠다 싶었다.


현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취업 후 나의 첫 발령지는 전남 영광군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읍내 주민들의 핫플레이스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 사무실 건너편 공터에서 열리는 5일장을 둘러보는 모습. 20년이 넘은 복도식 아파트에 50대 과장님과 같이 살고, 퇴근하면 회식에 불려 나가는 사회 초년생. 취업 후 내가 맞닥뜨린 현실이다.   


우리 회사는 규모가 꽤 큰 공기업이다. 덕분에 부모님께서도 취업소식에 기뻐하셨고, 주변에서도 많은 축하를 해주었다. 나 역시 취업준비를 하며 겪었던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라 만족했다. 합격 발표 후 직장인이 된 기쁨을 맘껏 누린 뒤 신입사원 연수를 받기 위해 회사 연수원으로 입소했다. 이 회사의 일원이 되었다는 뿌듯함도 잠시, 한 가지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과연 어디로 발령받을까?'


우리 회사는 전국 각지에 지사가 있는 터라 그 누구도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었다. 신안, 울릉도, 백령도 같은 격지에도 지사가 있어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해야 했다.


신입사원 연수 마지막 날 발표된 내 1차 발령지는 광주전남본부였다. 발령지를 보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어디선가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갯벌이 눈앞에 펼쳐졌다. 같은 지역으로 발령받은 동기들과 함께 지역본부가 있는 광주로 모였다. 본부 인사부서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에 모여 앉았다. 최대한 광주와 인접한 지역을 써내고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연수원 때보다 더욱 초조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회의실 스크린에 발령지가 떴다.

영광지사였다. 영광? 그 굴비 많이 나는 영광? 불행 중 다행이다 싶었다. 동기들의 발령지는 신안, 해남, 진도, 완도, 보성 등 다양했다. 영광이면 광주와 가까운 편이라며 동기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첫 지사가 발표된 다음 날 바로 출근이었다. 밤사이 내린 폭설에 첫 출근부터 지각할까 싶어 광주터미널에서 여섯 시 반 첫 차를 끊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여 걸려 영광터미널에 도착했다. 정장에 코트를 걸치고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끌며 눈길을 헤쳐나갔다. 지사는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지사에 다다랐을 땐 7시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지사 현관에서 눈을 털어낸 뒤, 2층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대리님 한 분이 끔뻑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누구냐 너는"

특유의 광주 사투리로 묻는 대리님에게 당황하며 대답했다.

"이번에 여기로 발령받은 신입사원입니다." 


대리님을 시작으로 지사장님을 포함한 선배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멀뚱히 사무실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될까? 어디서 지내는거지? 근심으로 가득한 나를 총무담당 선배가 불렀다.

"OO씨, 오늘부터 사택에서 지내시면 되시구요. 과장님이랑 같이 방 쓰시면 되세요."

과장님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나름 자취 경험도 많고 어디서든 잘 적응할 자신이 있었지만 회사 상사와 같이 지내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사택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기에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사택은 지사에서 도보 5분 거리 정도의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였다. 방 3개에 화장실 1개가 딸려있었다. 과장님께선 안방을 쓰셨고 잡동사니를 넣어둔 창고로 쓰이는 방 바로 맞은편에 비어 있는 작은 방이 내가 지낼 곳이었다. 오래된 외관에 비해 내부는 꽤 말끔했다. 리모델링한 화장실, 잘 정돈된 방,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과장님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 빼고는.


사택에서 지내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빨래를 하려고 보니 세탁기가 없었다. 과장님께 여쭤보니 자기는 주말에 집으로 빨래를 가져가셔서 세탁기가 따로 필요 없다신다.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다른 팀 차장님이 타 지역으로 발령받으며 자기가 쓰던 세탁기를 저렴하게 내게 양도하셔서 세탁 문제는 해결됐다.

세탁기가 없는 곳에 에어컨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여름에 접어들수록 자그마한 2평 남짓한 내 방은 점점 달궈져 갔다. 퇴근 후 해가 저문 무렵에도 달궈진 방은 쉽게 식지 않아 거실로 나와 앉아 선풍기에 의지해야만 했다.


영광살이는 녹록지 않았다. 퇴근 후 나는 자주 회식자리에 불려 나갔다. 저녁 먹고 들어가자는 상사들의 한마디는 대부분 술로 이어졌다. 저녁 8시면 인적이 드물어지는 시골이라 퇴근하고 할 게 없다는 걸 다들 알고 계셔서 술자리를 피하기도 어려웠다. 읍내의 여러 식당을 전전하며 하루 걸러 술을 마셨다. 그나마 다행히 같이 사는 과장님께서는 술을 잘 드시지 않으셨고, 내 개인 생활을 존중해주셨다.


같이 살던 과장님은 배울 게 많은 분이었다. 큰 병을 앓고 나으신 후 꾸준히 운동을 시작하셔 50대 후반임에도 탄탄한 몸매를 지니셨다. 우리 사택은 13층에 있었으나 항상 계단을 이용하셨다. 아침에는 6시에 일어나셔 간단히 식사를 하신 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근처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출근하셨다. 이부자리도 항상 말끔히 정리하고 청소도 도맡아 하셨다. 뭐 하나 나무랄 게 없는 훌륭한 과장님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제 발로 사택을 나왔다. 대학교 시절 비교적 또래와 같이 살던 4인 1실 기숙사에도 적응을 못해 혼자 자취를 했던 나는 혼자 사는 게 편한 성격이다. 그런 내게 아무리 훌륭한 분이라도 직장 상사는 직장 상사였다. 일찍 일어나시는 과장님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고, 퇴근 후 집에 와서 음성 채팅을 하며 게임하거나, 전화를 할 때도 소곤소곤 말했다. 돌이켜보면 충분히 감수할 만한 불편함이지만, 그때 당시엔 견디기 어려웠다. 회사와 부모님께 고충을 토로한 뒤 결국 광주 시내로 자취방을 구해 50여 분 거리를 출퇴근하는 고생을 감수했다.


그렇게 남은 1년을 광주에서 출퇴근 하며 근무하다 2018년 1월, 인천으로 올라왔다. 김치찌개 집에서도 밑반찬으로 조기가 나오던 영광살이에는 끝내 적응하지 못했지만, 사람이라는 가장 소중한 자산을 내게 선물해줬다. 사택에서 같이 살던 과장님께는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린다. 작년 내 결혼식 때는 같이 근무하던 직원분들이 많이 와주셨다.


전남 영광은 그렇게 미우나 고우나, 내 친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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