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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Jul 11. 2021

번화가에 살면서 변화가 왔다.

시끄러운 건 이제 질색

회사 입사 후 과장님과의 사택 살이는 1년을 채 못 넘기고 끝나버렸다. 너무나도 좋으신 과장님임에도 내게는 참을 수 없는 존재 셨기에  스스로 사택에서 나오게 됐다. 사무실에서 도보 5분 거리였던, 최고의 직주근접 옵션을 포기했다. 지사가 위치한 영광까지 광주에서 출퇴근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다. 광주에서 자취를 해야겠다 마음먹게 되었다.


전주에서 나고 자란 전라도민인 나에게도, 광주란 다소 낯선 도시였다. 스무 살 때 중학교 동창모임을 한 적이 있다. 그중 하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소재의 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하고 반년이 채 안된 시기에 만난 그 친구의 어투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세상 듣도 보도 못한 구수함과 사투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게 진짜 전라도 사투리구나. 남도 지역에 비해 전주 사람들은 억양이나 어투가 밋밋한 편이다. 스무 살에 만났던, 전주에서 나고 자라 6개월만 살았던 친구의 사투리. 내가 기억하는 광주의 첫인상이다.


광주를 기준으로 영광은 서쪽에 위치해 있다. 최대한 출퇴근이 용이한 곳을 알아보니 광산구, 서구 정도가 적합해 보였다. 상무지구 등 번화가가 밀집한 서구, 주거지역이 많이 들어서고 출퇴근이 편한 광산구 둘 중 고민하다가 광산구에 있는 수완지구가 눈에 들어왔다. 동네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천을 따라 아파트, 상가, 편의시설이 들어선 동네는 한눈에 둘러봐도 살기 좋아 보였다. 자취방이 필요해 아파트는 고사하고 원룸을 알아보다가 4층짜리 건물에 있는 전세 4500만 원의 투룸을 택했다. 빌라 1층에는 족발집이 있었고, 꼭대기층에 주인 내외분이 거주하셨다.


동네 자체가 개발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터라, 건물 외관도 깔끔했다. 방 내부는 더할 나위 없었다.

갓 대학에 입학해 지낸 4인 1실 기숙사부터, 입사 후 20년이 넘은 사택에 이르기까지 방 한 칸에서만 살았는데 투룸이라니. 인생이 두배로 행복해진 기분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자그마한 거실과 부엌이 딸려 있었고, 거실 한편에 문을 열면 널찍한 안방이 날 반겨줬다. 친구, 가족이 놀러 와도 이제는 널따란 거실에 담요를 깔아줄 수 있겠다는 사실에 벅찼다. 게다가 TV,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등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이 기본 옵션으로 제공됐다. 감개무량했다. 


칼바람이 불던 겨울 어느 날 이사를 마치고 광주에서의 삶은 순탄하게 펼쳐졌다. 출퇴근이 무려 10배가량은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내 삶의 질은 10배 이상 수직 상승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꿈꿔왔던 싱글라이프를 제대로 즐겼다. 침대 하나만 놓아도 공간이 꽉 찼던 원룸에서 꿈꿔오던 인테리어를 드디어 펼치게 됐다. 거실에 놓을 소파부터 선반장을 장식할 피규어까지 하나하나 공을 들여 골랐다. 점점 공간은 내 취향에 따라 구색을 갖춰갔다. 어둠이 앉으면 빔프로젝터로 거실 벽면에 영화를 틀어놓고 와인을 홀짝이며 황홀함을 누렸다.


날 두배로 행복하게 해 준 투룸에서도 항상 좋을 수만은 없었다. 빌라 건물 1층 주차장은 여러 번 날 번거롭게 했다. 11자로 4면이 있는 구조라서 항상 같은 건물에 사는 주민들과 내 차를 빼 달라거나 주민분의 차를 빼주시길 바란다며 서로 전화를 해야 했다. 의도치 않게 같은 건물 주민들의 생활 패턴까지 알게 된 셈이다. 주차는 사소한 번잡스러움이었다. 내가 살던 곳은 먹자골목에 위치했었다. 음식점, 술집이 즐비하다 보니 저녁이 되면 골목마다 복잡했고, 거리의 활력이 3층까지 흘러들어왔다. 여름에는 도저히 창문을 열고 잘 수 없었다. 새벽의 적막은 취객들의 고함과 이야기 소리로 와장창 깨지기 일쑤였다.


건물 주민들과의 마지못한 여러 통의 전화와 번화가의 활기는 날 여러 번 괴롭혔다. 한때 이런 곳에서 살면 좋겠다 싶은 소망은 막상 현실이 되니 괴리가 있음을 절절히 깨달았다.  홀몸이고 20대 후반의 젊음을 무기삼아 번화가 속에서 적응하며 살았지만, 새벽의 소음은 주거 환경이 새삼 중요하다는 걸 일깨워줬다.


광주라는 도시와 내가 살던 동네에도 어찌저찌 정이 들어갈 무렵, 나는 또다시 떠나게 된다. 정기 인사이동 시기에 자원해 인천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내게 잘 대해주시던 주인아주머니께 전세 기간을 채우지 못해 거듭 죄송하다 말씀드리며 방을 비워야 했다. 


지사 직원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짐을 챙겨 목적지인 인천으로 내비를 입력했다. 평일 오후의 도로는 한산했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 상념에 잠겼다. 다음 자취방은 어디가 될지 상상해봤다. '번화가는 피해야지.'였다. 탈(脫) 번화가 열망을 품은 채 인천으로 올라온 나는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스물아홉 살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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