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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Jul 18. 2021

서울, 23평 전세, 첫 신혼집

3억 500만 원.

2019년 8월, 우리 부부가 계약한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첫 신혼집의 전세보증금이다. 주방 수리비 명목으로 집주인 아주머니께서 보증금에 얹혀달라 하셔서 500만 원이 혹처럼 붙었다. 실거래가는 딱 떨어지지 않았으나, 500만 원 덕분에 말끔해진 주방을 누릴 수 있어 만족했다. 


덥고 습하던 8월의 어느 날 우리 부부는 이 아파트에 이르렀다. 결혼까지 9개월가량 남은 시점이었으나 사정상 결혼 전에 같이 살 집이 필요했다. 집을 알아볼 때 가장 먼저 고민한 건 직주근접. 인천 부평이 직장인 나와, 김포공항 근처로 출퇴근하는 아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인천 서구, 계양구부터 고양시에 이르기까지 부동산 어플 속 지도를 훑고 다녔다. 오랜 탐방 끝에 우리의 의견은 아내가 좀 더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강서구로 기울었다. 


전세자금 대출과 융통할 수 있는 돈을 감안했을 때 3억 언저리 정도가 마지노선이었다. 3억. 꽤나 큰 액수임에도 서울에서의 3억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화폐 단위가 커져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없어져버린 기분이었다.

매수는 여러 대출규제 때문에 꿈도 꿀 수 없었기에 처음부터 전세를 알아보았다. 2019년도 즈음부터 '영끌족'이라는 단어가 대지의 아지랑이처럼 곳곳에 피어올랐다. 내 주변에서도 영끌족이 속속들이 나타났으나 우리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로 터부시 했다.


부동산 어플로 손품을 판 끝에 최종적으로 걸러진 건 25년 정도 된 24평 복도식 아파트20년 된 23평 계단식 아파트 두 곳이었다. 매물을 올린 부동산 사장님들께 전화를 걸고, 약속을 잡아 두 군데를 둘러보았다. 복도식 아파트에 갔을 땐 세입자분들이 집안에 계셨다.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신혼부부 한 쌍이었다. 사장님은 이곳이 '올수리'됐고 가격도 괜찮으니 계약을 종용했다. 고민해보겠다 말씀드리고 사장님과 헤어졌다. 어떤 게 수리된 것인지 집을 둘러봤을 땐 체감이 되지 않았다. 24평임에도 전용면적이 작게 나와 집은 무척 좁아 보였다.


23평 계단식 아파트는 동 하나짜리 나 홀로 아파트였다. 전에 들렀던 복도식 아파트와 전세보증금은 비슷한데 상태는 훨씬 좋아 보였다. 방 3개, 화장실 1개는 연식이 조금 돼 보였지만 살아가는 데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집안을 둘러보던 우리에게 부동산 아주머니는 옆에서 덧붙이신다. 여기 살던 세입자분들 모두 집을 구해서 나가셨다고. 아주머니의 그 말 한마디는 부적처럼 내 가슴에 착 붙었다. 그래, 이곳이다. 


집을 둘러보고 나와서 아내와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얘기했다. 

"우리, 여기로 계약하자."

이후 몇 마디가 더 오갔고 식당에서 합의에 이르렀다. 부동산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계약하고 싶다 말씀드리고 가계약금 100만 원을 집주인께 송금했다. 첫 신혼집의 비공식적 계약이 강서구 모처의 식당에서 체결됐다.


기존 세입자분들의 이사날짜가 정해지고 우리도 그에 맞춰 준비했다. 가계약금을 치르고, 계약서에 내 이름을 새겼다. 혼수와 가전 고르기라는 중대한 미션을 큰 탈없이 치렀다. 밤공기가 시리워진 11월 초 무렵, 우리 부부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전셋집에 둥지를 틀었다. 확정일자와 전입신고까지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서울살이가 시작됨을 실감했다. 이곳이 우리의 날개가 되어주길 바랬다. '신혼집'이라는 단어에 담긴 희망과 설렘이 이곳에도 묻어있길 바랬다.


첫 신혼집에서의 나날들은 행복했고 만족스러웠다. 단지 앞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대형마트가 있었고, 음식점, 편의시설 등도 고루 갖춰져 있었다. 지하철역도 도보 10분 안팎에 위치해 이동하기 편리했다. 저녁이면 따릉이를 타고 근처 공원에 가서 아내와 산책했다. 더할 나위 없는 신혼 라이프를 이곳 전셋집이 누리게 해 줬다. 


이사 후 1년이 흘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곳에서의 추억들도 겹겹이 쌓여갔다. 동네 맛집들도 어느 정도 알게 됐다. 그럼에도, 달콤한 신혼생활 속에서도, 마음속 한구석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가족관계 증명서에 아내 이름이 한 줄 새겨졌고, 자연스레 현실의 중압감과 책임감은 더 커졌다. 언제까지 전셋집에서 머무를 수 있을까? 내 집 마련은 할 수 있을까? 여러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켜져 갔다.  때마침 임대차 3법이 발효되어 앞으로 조금은 더 오래 이곳 전셋집에 머무를 수 있겠다 잠시 안도했지만, 치솟는 집값은 우리가 이 집에서 머무는 동안 속절없이 떠나버릴 기세였다. 언론에서 최근 30대가 주택 매수 비중이 급증한다고, 영끌족이 늘어난다는 둥, 나와는 관계없다 생각했던 기사들이 더욱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년 말 어느 저녁, 밥상에서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이곳 전셋집을 가계약하던 2019년 여름의 그날이 겹쳤다.

"우리, 집을 사자."

전셋집을 처음 알아보던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한 마음으로 꺼낸 한 마디였다. 전셋집에 들어오고 1년 새 부동산 시장은 더욱 복잡해졌다. 의견과 기사들은 난립했다. 고점이다, 버블이다. 아니다 더 오른다, 어떻게 서든 집을 사라.

어떤 의견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나는 마음 놓고 우리가 살 집이 필요했다. 부담할 원리금이 많아지면 그만큼 절약해서 쓰면 된다 생각했다. 


충분히 이야기한 끝에 아내도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집을 사기로 결정한 뒤, 1년 여 전 전셋집을 알아볼 때처럼 다시 부동산 어플을 둘러보았다. 1년 새 현실은 더 가혹해졌다. 우리가 갖고 있는 돈과 대출을 최대한 끌어모아도 집을 사려면 서울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내 이름이 새겨진 등기부등본을 갖는다는 게 쉽지 않음을 절절하게 느꼈다. 


집을 사자고 아내에게 이야기한 뒤 두 달 남짓 됐을 무렵인 올해 초, 우리는 집을 매수했다. 영끌족이 된 것이다. 아내의 출퇴근 시간과 부담할 대출이자는 배로 늘어났고 손쉽게 이동하던 서울은 마음먹고 가야 한다.

옳은 결정이라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마음은 훨씬 편하다. 그걸로 충분하다. 1년 3개월 간 서울 전셋집에서도 행복한 기억들을 많이 쌓았고 우리 부부의 시간을 이루는 역사가 됐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마음놓고 살 수 없다는 막연함과 끝도 없이 오르는 부동산 가격은 결국 우리를 서울에서 나오게 했다. 


비록 서막은 짧게 마무리됐지만 이제 진짜 우리 집에서, 본 공연의 대서사가 펼쳐질 것이다. 전세집에서 웅크렸던 날개를 활짝 핀 채로 희망을 노래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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