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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Oct 05. 2022

공기업에서 남의 집 담장도 지어주게 될 줄 몰랐다

내가 만난 달콤 살벌 민원인들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는 내가 지원하는 회사들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 것인가였다. 이공계열에서 갈 수 있는 사기업의 경우 직무 구분이 뚜렷한 편이다. 채용공고의 모집 직군을 보면 어느 정도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유추해볼 수 있다. 연구개발, 생산관리, 플랜트 설계 등. 전공에서 배운 지식이 요구되는 분야가 대다수이다.

사기업과 비교했을 때 공기업과 공공기관은 애매모호하다. 물론 각 기관과 회사의 명칭을 통해 어떤 분야에서 일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다. 우리 회사의 경우만 해도 신입사원 공채 시 모집 직군을 사무, 전기, 토목, 건축, 통신 등으로 구분한다. 마치 교과목 같다. 취준생 시절 우리 회사 채용공고를 접했을 땐 입사 후 무슨 일을 하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사무 관련, 전기 관련 일을 하나보다 정도로만 짐작해볼 뿐이었다. 난 전기전자 전공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기’ 직군에 지원하게 됐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전기’ 일을 제대로 해보겠다는 당찬 포부와 함께 운 좋게도 지금 다니는 회사에 합격했다. 3주간의 신입사원 연수를 받고 나서야  ‘전기’ 직군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대략 알게 됐고, 연수를 마치고 지사로 발령받은 뒤에야 비로소 내가 이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확실하게 몸으로 깨달았다. 이 일련의 과정은 맛집 투어와 사뭇 비슷했다.



<맛집 투어 과정>
1. 고 싶은 메뉴를 선택한 뒤 SNS, 블로그 후기, 리뷰 별점 등을 보며 가고 싶은 맛집을 정한다.
2. 마음에 든 맛집에 부푼 기대감을 안고 식당에 갈 날만을 기다린다.
3. 블로그, SNS에서 보던 후기와는 다소 다른 음식에 당황하지만 일단 인증샷은 남기고 먹어보기 시작한다.


<공기업 입사 과정>
1. 희망하는 회사에 서류접수, NCS필기시험, 면접을 거쳐 합격 목걸이를 거머쥔다.
2. 합격 후 어디서 근무하게 될지는 꿈에도 모른 채 부푼 기대감을 안고서 발령일만을 기다린다.
3.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정신없이 쏟아지는 민원, 업무 등을 일단 쳐내기 시작해 본다.


지방 사업소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는 수도권에서 일하고 있는 현재에 비해 짜고 매운 경우가 많았다. 업무 경험이 일천한 신입사원이었고, ‘전기’ 직군의 업무지만  ‘민원’이 밑간이 된 일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 사업소의 경우에는 대민(對民) 응대가 사실상 업무의 5할 이상을 차지한다고 보는 게 맞다. 사업소 관할 에서 요구되고 발생하는 공익사업의 최전선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지역 주민, 기관, 단체 등과 접점이 많을 수밖에 없고, 이로 비롯되는 각양각색의 민원을 얼마나 잘 수행해내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학부에서 배웠던 전공지식보다 고객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 태도와 마인드가 현장에서 훨씬 더 필요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무뚝뚝하고 선택적으로 친절한 나는 고객들에게 썩 훌륭한 담당자는 아니었다. 나라는 인간의 기본 세팅값이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여러 고객들을 응대하며 시행착오를 겪어나갔다. 그리고 조금씩 깨달아갔다. 고객의 이야기를 듣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라남도 최서북단에서 서해에 인접한 인구 5.2만 명(22.08 기준)의 작은 동네인 영광군. 이곳 역시 여느 지방 중소 시, 군처럼 노년층 인구가 많은 편이다. 자연스럽게 상대하게 되는 고객들도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다. 염전, 밭, 양돈장, 소 축사, 양식장, 수산집, 마을회관 등 영광 구석구석을 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곳곳에서 마주치는 민원 역시 다양했다.


한 번은 장어 양식장 전기공급에 이상이 생겨 양식장의 장어가 떼죽음을 당한 적이 있었다. 양식장 사장님께서는 지사에 찾아와 바락바락 화를 내시며 죽은 장어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셨다. 피해금액이 꽤 큰 규모였고 장어구이를 좋아하는 나로선 꽤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사장님을 진정시켜 돌려보내드리고서 직접 현장에 나가 조사도 해보고 수습 과정을 거쳤다.  조사 결과 우리 회사 측 설비에 이상이 있음이 밝혀졌다. 양식장 주인께 적절한 피해보상을 지급했고, 한동안 양식장 사장님 형제분께서 운영하시는 장어집에서 회식을 하며 사후 케어 서비스에 일조했다.


또 한 번은 우리 회사에서 공사를 하는 도중 현장 인근 전원주택 담장에 균열을 일으켜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민원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분명 현장이 근처이긴 했으나 담장에 난 생채기 수준의 균열이었다. 집주인께서는 일부만 교체할 수 없으니 담장 전체를 바꿔달라 얘기하셨다. 다소 무리한 요구에 나는 과연 이게 우리 잘못인가 의심쩍어 유야무야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집주인 분께서는 강력하게 우리 측 잘못을 주장하셨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르신이 우리가 공사한 걸 빌미로 삼아 한몫(?) 챙기려나 싶어 어르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 얼마 후 우리 회사 측 도급업체가 시공 중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 인정했고 그때서야 나는 아차 싶어 어르신께 죄송하다 말씀드리고 원상복구를 약속했다. 사후약방문이었지만 다행히도 어르신은 수용하셨고, 마지막으로 댁에 방문했을 땐 날 자기 집 안으로 초대까지 해주셨다. 은퇴 후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부터 집에 쓰인 목재, 조경식물, 담장에 쓰인 벽돌 소재 등을 일일이 자기가 고른 거라 뿌듯해하셨다. 사모님께서 타 주신 차를 홀짝이며 집안을 요모조모 둘러보니 집주인 아저씨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내가 봤을 땐 그저 담장에 살짝 난 생채기에 불과했지만, 아저씨 입장에서는 자신의 손떼가 묻은 집 담장 또한 무척 소중했을 것이다.


위 두 사례의 경우에는 우리 회사의 잘못인 게 밝혀져 원만하게 해결된 경우지만, 이와 반대인 경우도 많았다. 고객이 요구하는 사항이 수용하기 어려워 수차례 대안을 제시해도 타협점을 찾지 못할 때는 무척 난감했다. 이럴 땐 가끔 소송까지 일이 커지기도 했다. 담당자 입장에서는 법원의 판결을 받는 게 오히려 속이 편할 수도 있지만, 판결에 이르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시간, 에너지 등을 고려했을 땐 고객과의 원만한 협의를 이끌어내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이건 말이 쉽지 실제로는 무척 어려웠다. 가끔 요구사항이 수용되지 않으면 직접 사무실에 찾아와 고성, 욕설을 일삼는 사람들을 보면 나 역시 감정적으로 동요됐다. 그럴 때마다 같이 근무하는 선배들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보여주듯 성난 민원인들도 잘 달래주시곤 했다. 선배들이 응대하는 모습 역시 결국 민원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2년 간 영광에서 근무한 뒤 인천으로 올라와서도 우연치 않게 도시 대신 도서지역을 담당하게 됐다. 연평도를 비롯해 덕적도, 자월도, 승봉도 등 이름조차 생소한 섬들에 출장을 나갔다. 도서지역 담당 시절 덕적도에서는 이장님이 민원을 넣으신 적이 있다. 명예교수 퇴직 후 자신의 고향인 덕적도로 귀향하여 이장직을 맡으신 지 얼마 안 되셨다. 박식하셨고, 동네를 생각하는 마음에 비례해 민원의 강도도 셌다. 처음엔 이장님이 원하는 것과 우리 회사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의 접점을 찾기 어려웠으나, 수차례 이장님과 만나 이야기하고 진심을 다했다. 나중엔 이장님이 민원 관련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선착장까지 직접 차를 몰고 나를 픽업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셨다. 아담한 마당이 있는 작은 단층 주택이었다. 사모님께서 타 주신 차를 홀짝이며 이장님의 일장연설을 청취했다. 마을의 역사부터 교수 재직 시절 썰에 이르기까지 소재는 다양했다. 정작 민원 관련 이야기는 얼마 하지 않고서 인사를 드린 뒤 이장님 댁에서 나왔다. 영광에서 담장에 상처를 내 집안에서 이야기 나누던 어르신의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됐다.


그랬다. 나는 달라져 있었다. 영광에 있을 때보다 민원인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고 상대하는 데 마음이 한결 편해져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자존심만 내세우던 영광에서 수련기간을 거친 덕분에,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생겨나는 민원에도 내성이 생겨 이전보다 일하기 훨씬 수월해진 것이었다.


2015년에 취업준비를 할 때만 해도 내가 영광에서 근무하게 될 거라고, 그리고 섬으로 출장을 가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어쩌면 상상해보지 못했던 것들이기에 현실로 다가왔을 때 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골 사업소에서의 근무는 내게 있어 '인간군상탐험해볼 수 있던 자유이용권'이었다. 놀이동산 이상으로 구성은 다양했다. 회사에서 날 영광으로 발령시키며 쥐어준 2년짜리 자유이용권을  알차게 쓴 덕분에 세상과 사람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넓어졌다. 그리고 어디에 가더라도 일할 수 있고 살아낼 수 있다는 단단함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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