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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Aug 31. 2022

포켓몬스터는 시골에 살지 않았다

포켓몬 없어서 시작한 것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커피를 들고서 빌딩 숲 사이를 여유롭게 산책하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삶에도 차차 적응이 됐다. 점심시간이 되면 식사 후에 읍내 이곳저곳을 산책했다. 시골에서 나름 '번화가'인 읍내인지라 낮에는 꽤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도시와 시골의 낮은 몇 가지 다른 모습들이 있었다.


시골의 낮


점점 커가는 강쥐들..

먼저 거리 곳곳에 자유로운 강아지들이 눈에 띄었다. 어딘가에서 기르고 있을 강아지들이 읍내 거리를 마치 제 집 앞마당인 양 돌아다녔다. 위 두 녀석과는 거의 두 달 가까이 비슷한 위치에서 마주쳤다. 날 보면 쳐다보긴 했지만 끝내 거리를 두며 날 애태우듯 유유히 사라지곤 했다. 두 달 새 쑥쑥 자라 나름 늠름해진 모습을 보며 내가 영광에 살고 있다는 걸 일깨워줬다. 혼자서 산책하던 내 길동무가 되어줬던 시골 강쥐들이 가끔씩 떠오르곤 한다.


읍내에 가장 활기가 도는 날은 5일마다 찾아왔다. 지사 건물 건너편 공터에서 5일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6시 내 고향에서나 봤던 5일장이 눈앞에 펼쳐지다니.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오전부터 분주했고 우리 지사 건물 주차장에도 차들이 가득 들어섰다. 5일장에서는 없는 거 빼곤 다 팔았다. 각종 의류, 잡화부터 닭, 토끼 등에 이르기까지 사물 생물 가리지 않는, 읍내의 복합쇼핑몰이었다. 가끔씩 5일장에 직접 나가서 기웃거리곤 했다. 내가 5일장을 가볼 날이 올 줄이야...

오일장이 열리던 때

또 한 가지 재밌었던 건 신호등이 꺼져있는 도로가 읍내 군데군데 있었다는 점이다. 터미널이 있는 읍내의 센터 오브 센터 부근의 편도 2차선 사거리에도 점멸등만 깜박였다. 처음에는 신호등이 고장 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차들은 마치 약속된 플레이를 하듯 사거리를 가로질렀다. 통행량이 많은 사거리가 이 정도이니 소로나 이면도로 같은 곳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유롭고 정이 넘치는 도로 덕분에 시골에서 자연스레 방어운전을 익히게 됐다.  


내가 영광에 있던 시절엔 한참 '포켓몬 고'라는 모바일 게임이 대유행 중이었다. 증강현실 기반으로 실제 거리에서 포켓몬을 잡느라 스마트폰만 보며 사람들이 걷던 시절이었다. '포켓몬 성지'로 유명해진 곳은 사람들이 직접 찾아가기도 했고 포켓몬이 많이 나오던 속초는 원작 게임 주인공들의 고향 마을인 ‘태초마을’을 패러디해 ‘속초마을’이라는 별명도 붙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나도 이 인기에 편승해 포켓몬고를 설치하고 게임을 즐기려 했지만 이내 포기해야만 했다. 포켓몬들은 시골에 살지 않았다. 내 스마트폰 화면에는 외로이 걷는 아바타만 보일 뿐이었다. 아무리 읍내 곳곳을 돌아다녀도 포켓몬들이 보이지 않았다. 도시에 살던 친구들이 레어 포켓몬을 잡았다니 뭐가 어쨌다니 하는 걸 보며 눈물을 훔쳐야 했다. 도시놈들이 이때처럼 부러웠던 적이 없었다.

포켓몬고 게임 화면(출처 : 아주경제 뉴스)



시골의 밤


시골의 낮은 차차 적응이 됐지만 밤은 아니었다. 시골의 밤은 도시보다 일찍 찾아온다. 밤이 훨씬 길다. 저녁 8시가 넘어가면 거리는 한산해진다. 점멸등만 반짝이는 터미널이 있는 사거리 부근도 예외는 없었다. 점심시간에는 읍내 거리로 산책 나가면 날 반겨주던 동행견들이라도 있었지만, 밤에는 거리도 깜깜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포켓몬은 없지만 들짐승이 불쑥 튀어나올 수 있겠다 싶퇴근 후엔 회식이 없을 때 곤 곧장 사택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서 사택으로 가는 길목에는 2층짜리 상가가 있었다.  음식점, 편의점, 마트, 학원 등이 위치해 종종 이곳에서 밥을 먹거나 장을 보고서 귀가했다. 1층에 있던 추어탕집은 사택에 같이 사시는 과장님과 자주 저녁을 먹다 보니 단골이 됐다.


영광으로 발령    남짓 됐을 무렵이었다. 상가 건물을 지나다 2층을 올려보니 눈길을 끄는 곳이 있었다. 바로 ‘특공무술 체육관’이었다. 호랑이 그림과 태극기가 그려진 체육관 창문을 보자 호기심이 생겨났다. 무술이라고는 초등학교  누구나 하던 태권도와 입사  맛만 봤던 킥복싱 6개월 경력이 고작이었지만 퇴근하고  것도 없는 마당에 새로운 취미를 심어보자 싶었다. 재야에서 혹독한 훈련을 하고 강해져 나타난 무림고수처럼, 시골 읍내에서 특공무술을 배워 언젠가 도시에 돌아가 포켓몬 많이 잡았다고 떵떵거리는 도시놈들에게 매운맛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기다려라.. 도시놈들(출처 : MBC 나 혼자 산다)

포켓몬 트레이너 대신 무술인으로 거듭나자 다짐하고 퇴근 후 어느 날 체육관이 있는 가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에서부터 파이팅 넘치는 구령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수많은 눈들이 내게 향했다. 초딩부터 고딩까지 죄다 학생들이었다. 관장님 어디 계시냐 물어보자 수많은 입이 내게 대답해 정신이 없었다. 사무실에 계신다는 정보를 친구들에게 듣고서 체육관 안쪽에 있는 사무실 문을 노크 후 관장님과 대면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인상의 관장님을 보자 이분이라면 날 강하게 만들어 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상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체육관에 성인이 거의 없다는 게 조금 께름칙했지만 이미 그의 믿음직스러운 외모에 넘어간 탓에 상담을 마치고 수강료를 결제한 뒤 곧장 다음날부터 체육관을 나가기 시작했다. 시골에 와서 특공무술인으로 거듭나다니.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특공무술은 내 생각보다 훨씬 다채롭고 흥미로웠다. 기본적인 발차기, 정권지르기부터 낙법, 쌍절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체활동을 할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재미도 있고 운동도 됐다. 배운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나보다 한참 어린애들이 화려한 동작을 수행하는 걸 보며 시샘이 났다. 무술인에 대한 의지가 점점 커져갔다. 방과 후 태권도장을 다니던 시절 새로운 품새를 배워가던 잼민이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특공무술 자체는 정말 재밌었지만 나 빼고는 성인이 없다 보니 중,고등학생들과 함께해야만 했다. 시골 특성상 20,30대 젊은 층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활기차고 정제되지 않은 순수한 친구들과 더부끼며 무도인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학생들 얼굴이 익어갔고 삼촌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고 공기업에 다닌다 하자 공부 팁을 내게 물어보기도 했다.


친구들과 친해지고 같이 무술을 배운다는 건 좋았으나 수련 중 가끔씩 난처한 순간이 찾아왔다. 친구들 사이에 껴서 관장님의 훈계를 받는 경우가 종종 생겨났다. 관장님은 수업 중 친구들이 통제되지 않으면 집합시켜 ‘정신교육’을 수행했다. 관장님께선 내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친구들에게 훈계를 했지만 학생들 무리에 껴있다 보니 괜히 뻘쭘했다. 처음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점차 관장님의 훈계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운동하며 흘리는 개운한 땀 대신 훈계를 들으며 식은땀이 흐르는 날이 잦아졌다. 소인국에 표류한 걸리버라도 된 것 같았다. 무도인이 되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관장님의 호령소리와 함께 점점 옅어졌다.


낮에는 읍내를 유유히 돌아다니고 밤에는 무술을 배우는 재야(在野)의 삶은 얼마 못가 엔딩을 맞이한다. 무술에 대한 열정에 찬물을 끼얹은 사고가 발생했다. 혼자서 돌려차기를 연습하다가 바닥에 고꾸라지며 그만 발등과 발가락이 부러져버렸다. 발 안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하고서 한 달 가까이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퇴원 후엔 두 달 넘도록 목발을 짚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특공무술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부서 대리님께서 나 대신 식판에 밥을 떠다 주셨고, 목발을 짚고서 읍내 PC방에 땀을 뻘뻘 흘리며 가야 했다. 몸이 불편한 건 그럭저럭 버틸만 했으나, 자칫 내 처갓집이 영광이 됐을 수도 있었을 이벤트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 게 더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다음 편에 계속)


 *지난 이야기 다시 읽기

- 1편 

- 2편

<공기업 붙었는데 시골로 떨어졌어요>매거진 구독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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