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근무하면서 피할 수 없던 매가 있었다. 바로 중매다. 일일드라마에서나 보던 중매가 시골에선 잦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든 중매쟁이가 불쑥 나타났다. 우주의 기운이 시골에 불시착한 젊은 청년에게 쏟아지기라도 한 것처럼.
지방으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그 지역에서 짝을 만나, 연고도 없는 곳에 터를 잡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남의 둥지에 탁란하고 부화하는 뻐꾸기처럼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도 영광에서 근무하며 그쪽 지역에 둥지를 틀 수도 있을뻔한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시골에서 떠나게 됐다. 민,관 협동 중매공세에도 불구하고 짝을 찾지 못한 채말이다.
영광으로 발령받은 뒤 춥고 쓸쓸한 첫겨울을 보냈다. 눈은 어찌나 오던지 군대에 재입대라도 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제대 이후 가장 혹독했던 겨울을 보내고 나니 어김없이 이곳에도 봄은 찾아왔다. 지사 건너편 광장에서 열리는 5일장엔 더 많은 사람이 북적였고 거리 곳곳에는 푸릇푸릇 봄꽃이 피어나며 정겨운 풍경을 더해갔다. 회사에선 미숙하지만 업무를 하나둘씩 알음알음 깨우쳐가고 있었다. 아침에는 출근 전에 새로 오신 팀장님과 함께 맥주병을 벗어나고자 새벽 수영을 다니기 시작했고 퇴근 후 특공무술에도 재미를 붙여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시골 라이프에 적응해 나갔다. 봄도 왔고 몸도 적응해갔지만, 마음 한구석 어딘가는 뻥 뚫린 기분이었다. 시골에서라도 연애를 하고 싶어졌다.
봄기운은 차오르고 마음은 헛헛해져 가는 어느 봄날의 오후 사무실, 군청에서 배부된 공문 하나가 눈에 띄어 읽어보았다. 청춘 남녀를 대상으로 행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나는 솔로’ 전남 영광 편인 셈이었다. 군청에서 직접 중매쟁이를 나서 이런 행사를 한다고?? 누군가 장난을 친 건가 싶었지만 공문 내용은 꽤나 구체적이었다. 영광군에 거주 중인 20-30대 남녀 15명씩을 모집해 MC까지 대동하는, 영광 모처의 농원에서 열리는 남녀 만남 행사였다. 공문을 쭈욱 읽다 보니 솔깃했다. 영광에서 맞이한 첫봄에 남녀 미팅 행사라니. 공문을 내려 읽는 동안 마우스 스크롤을 드르륵 긁는 손가락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행사는 금요일 오후에 열릴 예정이라 휴가를 내야 했다. 팀장님께 공문을 출력해 보여드리며 여기에 참가해도 되겠냐 여쭤보자 나를 힐끔 보더니 호탕하게 웃으시며 적극 참여를 권장하셨다. 팀장님의 승인도 떨어졌겠다, 야심 차게 지원서를 행사 담당 공무원에게 메일로 제출했다. 며칠 뒤 담당 공무원에게서 행사 참석대상으로 선발됐다는 연락이 왔다. 회사에 합격했을 때만큼 기분이 째졌다. 이후 행사날을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영광에서도 봄날이 오겠다는 부푼 마음을 안고서…. 하지만 그 부푼 마음은 뜻밖의 사건으로 터져버리고 말았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퇴근 후 시작했던 특공무술이 미팅 행사가 열리는 농원으로 향하는 내 발목을 잡았다. 특공무술 체육관서 무도인이 되기 위한 맹훈련을 거듭하던 어느 날, 나 혼자서 뒤돌려차기를 연습하다 고꾸라지며 오른발이 그만 부러져버렸다. 불과 미팅 행사 3일 전이었다. 체육관의 초록색 매트에서 격통에 신음하며 뒹굴거리는 순간에도 햇빛이 가득하고 사람들의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농원이 아른거렸다. 행사에 참석할 수 없겠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 결국 영광에 있는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서 진통제를 맞고 끙끙 앓으며 비통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입원 다음날, 부러진 발등과 발가락의 붓기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담당의사는 수술을 바로 해야 한다 으름장을 놨다. 잘못하면 평생 절을 수 있다는 경고에 보호자로 오셨던 회사 팀장님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난 되려 벙쪄서 아무런 반응도 못하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부모님과 전화로 상의했고, 읍내 명의분에게는 내 발을 맡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부모님이 계신 전주에 손, 발 접합 수술로 유명한 정형외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절뚝거리는 아들을 위해 한 시간 반을 부리나케 달려오신 어머니 차를 타고서 전주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나는 행사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죄송한데, 행사 참석하기 힘들 거 같습니다. 발이 부러져서 지금 수술하러 가고 있어요.” "정말이세요? 하 안되는데.. 명찰까지 다 제작해놨는데 참석하기 어려우신가요 정말??”“네, 저도 정말 참석하고 싶은데… 도저히 갈 수가 없게 됐어요 죄송합니다…”
담당 공무원은 혹시 지사에 다른 분이 대신 참석할 수 있냐 묻기까지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지사에는 나 혼자만 미혼에 20대인 탓에 그분의 간곡한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바라본 5월의 하늘은 시리도록 맑았다. 날씨가 좋아서, 적당히 좋아서, 나도, 행사 담당 공무원도, 울었다.
발과 함께 행사에 참석할 결심은 부러져버렸고 나는 결국 늦봄의 쨍한 하늘을 영광 모처의 농원에서 여성분의 손을 잡은 대신 전주 병원의 옥상 테라스에서 두꺼운 깁스를 두른 발을 휠체어에 올려놓은 채 맞이했다. 후에 찾아보니 행사 며칠 전 내가 빠지게 돼 난색을 표하던 공무원의 우려와는 달리 행사는 원활하게 진행된 것 같았다. 언론 기사에도 행사 내용이 보도됐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사회자는 임시로 15쌍을 만들고는 남녀가 함께 스테이크를 먹도록 유도했다. 오후에는 서로 손을 잡고 진행하는 보물찾기 등 이벤트가 이어졌다. 마지막 공개 프러포즈 시간이 되자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다가가 빨간색 장미꽃을 건넸다. 여자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 경우 분홍색 장미꽃을 선물했다. 이렇게 해서 8쌍의 커플이 탄생했다.
발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나도 저기서 누군가와 복면을 쓴 채 칼질을 하고 있었을 거라 떠올리니 이제는 다 나은 발이 괜히 시려오는 기분이다. 이 행사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거나 하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언제 내가 이런 걸 해볼 수 있을까 했던 아쉬움이 더 크게 남아있다. 시골에서 근무하지 않았다면 ‘지방자치단체’에서까지 중매쟁이를 나선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군청에서까지 중매쟁이를 자처했으니 주변 분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지사 선배분들의 적극적인 중매 공세는 쉴틈이 없었다. 매번 중매 제안이 들어올 때마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거절하는 게 일이었다. 여러 선배들 중 인맥이 넓으시던 과장님 한 분이 무척 적극적이셨다. 자기 동네 단골 소고기집의 사장님이 어디 지역 미스코리아 출신인데 딸이 한 명 있으니, 거기서 소고기 한 번 먹으러 가서 눈도장 찍으라고도 하셨다. 과장님 말씀을 들으며 소고기집에서 불판을 닦으며 가게문을 닫는 안락한 노후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또 한 번은 자기가 자주 들르는 주유소가 있는데 거기 사장님 따님분이 괜찮다고도 하셨고. 가끔씩은 지사에서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서도 식당 사장님께도 날 소개해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농담 반 진담 반 들어오던 중매는 한 번도 성사된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소개받는 거 자체가 부담스러웠던 터라 에둘러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광에서 2년 간 근무하며 연애도 하고 영광은 아니더라도 광주에 터를 잡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그쪽 지역에 둥지를 틀지 않고서 수도권으로 근무지를 옮겨왔다.
지방에서 근무하면 사실상 ‘자만추’는 어불성설에 가깝다. 남고, 군대, 공대, 지방의 남초회사 테크트리를 거치며 나이를 먹게 되면 연애하기 녹록치 않다. 특히 시골의 경우엔 젊은 사람 찾기가 정말 힘들다. 어엿한 직장을 얻고서 연애를 해봐야겠다는 굳은 다짐이 척박한 환경에서 파사삭 메말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난 영광으로 발령받은 뒤 군청에서도, 지사 직원분들도, 식당 아주머니도 중매를 서던, 축복받은(?) 환경이었다. 나와 달리격오지에서 근무하며 평일에는 회사 빼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근무하는 분들은 이런 기회조차 흔치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연애하고 결혼하는 게 의무는 아닌 세상이지만 연고 없는 곳에서 나 홀로 지내는 적적함의 무게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 때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정말 큰 힘이 될 수 있다. 그러다 연이 깊어져 그 지역에 정을 붙이고 터를 잡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고…. 오늘도 어딘가에서 지역 이름조차 생소한 곳에서 외로움을 이겨내며 근무하고 있을 분들에게 안녕과 연애운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