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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Sep 22. 2022

색소폰 연주를 들으며 낮잠을 잔다는 건

공기업, 공공기관 특성상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서 근무하기가 어렵다.  생각보다 많은 곳들이 전국 각지에 본사, 지점을 두고 있다. 우리 회사의 경우엔 백령도, 신안, 울릉도에 이르기까지 지점이 있기 때문에 입사 후 자신의 연고지나 수도권으로 발령받을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러한 정주여건의 불확실성은 취업준비 시절에는 단순히 직장을 고르는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 요소가 현실이 되면  무게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내가 입사했을 당시 연수원에서 만난 서울 토박이 여자 동기는 서울 소재의 대기업 인사팀에도 합격해 결국 연수기간에 우리 회사를 포기하고 그 회사로 옮겨갔다.  


생경한 풍경, 지역의 특색, 낯선 사람들... 지방에서 근무하면 업무 외에도 적응하고 이겨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절망만 있지만은 않다. 나는 2년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외부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시골에서 근무하는 동안 즐겨보려 했다. 까짓 거 군대 온 것도 아니 입사를 열망했던 회사였으니 피할 수 없음 즐겨보자는 마인드였다. 이런 마인드로 영광에서 근무한지 1년이 넘어갔을 땐 지역 홍보대사라도 된 것처럼  지인들에게 광을 소개하고 자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렇게 적응하고 즐기게 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같이 근무했던 선배, 동료들 덕이 크다.


요즘 같은 시대에 회사에서 '가족 같은 분위기'는 지양되지만, 내가 근무한 영광지사는 흡사 대가족 인원 구성과 비슷했다. 전체 인원이 30명 남짓이라 직원 모두가 서로를 잘 알고 지냈다. 난 아침에 출근하면 내가 근무하는 2층 사무실에 들르기 전에 항상 1층 창구와 운영실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올라갔다. 스몰토크를 나누며 티백 녹차나 다방커피를 호로록호로록 대며 하루를 시작했었다.


점심시간엔 우리 지사 직원들은 식구(食口)였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 같았다. 근무인원이 적다 보니 구내식당은 이모님 한 분만 계셨다. 이모님이 기본적으로 해두신 밑반찬을 식판에 덜고, 그날그날 바뀌는 메인 요리를 테이블로 가져와 먹었다.  찌개, 탕, 고기, 생선 요리 등 메인 요리 종류는 다양했다.  세네 명이서 한 테이블에 앉아 가운데 놓인 메인 요리를 사이좋게 덜어 먹었다. 나는 막내라고 고기 한 점, 국물 한 숟가락 더 뜰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구내식당에선 종종 지사 행사도 열렸다. 행사가 있는 날에는 꼭 빠짐없이 밑이 넓은 냄비에 한가득 뚝배기 불고기가 나왔다. 자박자박한 국물에 간간하게 양념이 밴 얇게 저민 불고기는 어떤 식당에서 먹었던 것보다 맛이 좋았다.


이렇게 매일 인사를 나누고 얼굴을 마주한 채 식구처럼 밥을 나눠먹던 사람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만큼 가까울 수는 없었지만, 매일매일 직원들과 부대끼며 지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정이 들었다. 2년 간 근무하며 안 좋은 기억보다는 재밌고 반짝이던 순간들이 훨씬 더 기억에 많이 남는다.

 


점심시간에는 산책을 하거나 낮잠을 잤다. 나의 낮잠 장소는 정말 피곤한 날, 조금 졸린 날에 따라 사택, 또는 지사 건물 강당으로 나뉘었다. 지사에는  외부 기관에서 대관하여 행사에 사용하는 2층짜리 강당이 딸려있었다. 나의 낮잠 스폿은 강당의 2층 구석자리였다. 어둑한 강당에서 서늘한 공기를 베개 삼아 단잠에 빠지곤 했다.1층 총무부서의 C과장님 덕분이었다. C과장님은 색소폰을 취미로 연주하셨는데 실력이 수준급이셨다. 아내분을 위해서 연습하기 시작했다고 웃으시며 말씀하시던 얼굴이 떠오른다. 점심시간이면 과장님은 강당 무대에서 호젓하게 색소폰 연주를 하셨다. 구내식당 이모님의 따순 밥을 먹고 노곤한 몸을 빨간 강당의자에 누인 채, 라이브로 색소폰 연주를 들으며 낮잠을 잘 수 있는 낭만을 영광에 온 덕분에 누릴 수 있었다.


발목 높이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서 출근했던 첫날 아침에 날 맞이해주셨던 H대리는 무척 재밌으신 분이었다. 나이는 40대시지만 집안에서 말썽 피우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막내 같은 느낌이랄까. 광주 특유의 운율 가득한 사투리로 장난기가 항상 넘쳤다. 실없는 농담도 자주 하고 장난이 가끔 과한 면이 있어 호불호가 있었지만 난 H대리가 좋았다. 업무는 비록 조금 설렁설렁하긴 하셨지만 회식자리나 사석에선 분위기 메이커를 도맡으셨다. 일과시간이 끝날 때쯤 사무실을 어슬렁거리시며 '오늘 뭐 이벤트 없냐' 묻곤 하셨다. 난 보통 없다 대답하고 애써 눈을 피하곤 했다. 한 번은 H대리가 크게 사고를 친 적이 있었다. H대리를 비롯해 과장님들까지 해서 골프를 쳤는데, 한 과장님이 홀인원을 성공시켰다. H대리는 홀인원을 무척이나 축하하고 싶으셨던지 과장님의 이름과 사진을 대문짝 하게 프린트한 현수막을 제작해 사무실에 걸어두었다. 평소 과묵하고 나긋하시던 과장님은 현수막을 보더니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현수막을 내리라 했다. 처음 보는 과장님의 모습에 당황한 H대리는 부랴부랴 현수막을 떼어냈고, 난 그걸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만 했다.


야구팬이신 지사장님 덕분(?)에 우리는 종종 광주로 기아 타이거즈 경기 관람을 다녔다. 직관을 해보니 확실히 TV 중계로 볼 때보다 훨씬 재밌었다. 야구 직관이라고는 정말 어렸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가서 꾸벅꾸벅 졸았던 기억밖에 없다.별다른 재미를 못 느꼈기 때문에 회사에서 상사들과 야구까지 보러 가야 하나 싶었으나 웬걸, 야구 직관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였다. 야구장에 다 같이 자릴 잡고 앉아 함께 치맥을 곁들이며 응원도 하고 욕도 했다. 기아 타이거즈가 승리라도 하는 날엔 어김없이 2차가 이어졌다. 광주만 해도 영광에 비하면 엄청난 대도시이기 때문에 도시의 활기찬 밤공기에 얼큰히 취해버렸다.


한 번은 야구 관람 후 광주에 사시는 과장님의 단골 술집에 간 적이 있었다. 동네 골목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노포였다. 신발을 벗고 좁은 방에 올라가 불편하게 끼여 앉아 사장님이 차려주신 반상에 술을 곁들이며 기아 타이거즈의 승리를 자축했다. 술을 다 마시고 나왔는데 놀랍게도 우리 옆방엔 당시 기아 타이거즈의 김기태 감독을 비롯해 코치진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늘 경기 잘 봤다며 용기를 내 감독님께 'to. 영광지사'로 사인을 받고 술집 앞에서 벌게진 얼굴로 사진을 찍었다. 감독님의 사인지는 곱게 코팅하여 지사에 기증했다.


발령받은 지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나는 광주에 자취방을 얻어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편도로 50분, 40km를 매일 운전하는 걸 감수하고 사택에서 나오는 걸 선택했다.

처음엔 제법 다닐만했다. 출근길을 따라 펼쳐진 정겨언 풍경을 길벗삼아 여행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매일매일 80km를 운전하는게 쉽지 않았다. 결국 나처럼 광주에서 출퇴근하시는 지사 선배님들과 카풀을 하기 시작했다. 1층 영업부서의 K과장님,  I대리님 셋이서 함께 다녔다. 카풀을 하니 확실히 편하고 경제적이었다. 내가 운전하지 않는 날엔 바깥 경치도 맘놓고 구경할 수 있었다.


카풀 멤버였던 K과장님은 애처가이자 딸바보셨다. 내게 항상 가족을 우선시해야 한다 조언해주셨고 나이차가 꽤 많이 나는 데도 신입사원인 날 무척 편하게 대해주셨다. 눈이 많이 온 날 K과장님의 차를 타고 출근하던 날이 기억에 남는다. '난 눈이 오는 게 좋더라. 우리 집 베란다에서 고등학교 운동장이 보이거든? 눈이 온 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운동장엔 소복이 눈이 쌓여 있어. 하얗고 정갈한 운동장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정말 편해져.' 

과장님을 생각하면 눈이 쌓인 말갛고 넓은 운동장이 내 마음속에 환히 떠오른다.



광에서 만난 사람들과 2년의 시간을 보내고, 2018년 1월 인천으로 발령받아 짐을 싸 올라오던 때가 생각난다. 애증 하던 팀장과 흡연장에서 포옹을 나누자 만감이 교차했다. 위에 올라가면 맛있는 거 많이 없을 테니 올라가지 말라는 회유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지만 이내 차에 몸을 실었다.  한겨울의 한낮,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2년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A급 신입사원은 아니었지만 내게 호의를 베풀어주었던 A급 선배 동료들 덕분에 영광에서 근무하며 쌓은 추억이 정갈한 겨울 하늘 아래 맑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경험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색소폰을 들으며 낮잠을 잘 수 있던 순간이 사뭇 뭉클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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