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 Sep 27. 2022

회식으로 삼겹살 따윈 먹지 않던 동네

스무 살 이후 남들에게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내게 돌아오는 말이 있다. 아~그 비빔밥?? 내가 전주 출신이라 밝히면 열이면 아홉은 비빔밥을 언급했다. 비빔밥에 응수하기 위한 내 화답은 콩나물국밥이었다. 전주 사람들은 비빔밥을 잘 사 먹지 않는다. 오히려 콩나물국밥이 로컬들이 좋아하고 자주 먹는 음식이다. 덧붙여 전주 음식에 대한 자부심도 드러냈다. 어느 음식점에 가도 평타 이상이다, 밑반찬이 모자람 없이 나온다 등.  내 고향의 미식 수준에 대한 콧대높던 긍지는 입사하고 전남 영광으로 발령받은 뒤 잠시 접어둬야 했다. 찐 남도 음식이 기다리고 있던 미식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흔히들 회식에서 자주 먹는 삼겹살, 광어회, 돼지갈비는 영광에 있는 동안 외려 소외되는 메뉴였다. 이곳엔 너무나도 많은 음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굴비한정식, 민어회, 덕자찜, 보리굴비, 쫄복탕, 백합구이, 복지리 등을 회식에서 먹으며 회사를 다녔다. 화려한 라인업의 남도음식을 2년 간 먹으며 깨달았다. 음식은 남도라는 사실을.


남들에게 영광에서 회사를 다닌다고 소개를 할 때마다 듣는 말이 있었다. 아~ 그 굴비??. 나 역시 발령받기 전에는 전남 영광하면 굴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명절시즌 선물로 항상 빠지지 않는 굴비세트에는 어김없이 '영광'이 고유명사처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영광이 굴비의 고장인지 알게 되는 데는 발령받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치찌개 집에서 조기가 밑반찬으로 나오는 걸 보고 받았던 충격은 잊혀지지 않는다. 특히 서해안에 인접한 법성포라는 포구에 가보면 단박에 영광굴비가 유명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법성포구 초입에 들어서면 금이라도 팔딱팔딱 움직일것 같은 거대한 은 굴비 조형이 있는 로터리가 나타난다. 로터리를 돌아 들어가면 포구 쪽 도로 양 옆으로 굴비 수산 집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산집 곳곳마다 노란 끈에 엮은 굴비가 주렁주렁 걸려있어 자동차 창문을 닫고 있어도 짠내가 스며 들어왔다. 수산집들을 가로질르는 도로를 지나는 동안에는 마치 굴비에게 의전을 받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법성포에는 실제로 500개가 넘는 굴비 수산 집이 있다.

굴비 조형물 앞에서 지사홍보 동영상도 찍었다..


법성포엔 두말할 것 없이 굴비를 필두로 한 한정식집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영광에서 오래 근무했던 선배들은 법성포의 한정식집엔 가지 않으셨다. 관광명소다 보니 가격이나 메뉴가 다소 비합리적이다는 이유였다. 우리 지사에서는 법성포에서 굴비보다는 다른 음식점들을 더 자주 갔다. 그중 ‘쫄복탕’을 취급하는 곳이 기억에 남는다. 쫄복이란 음식은 영광에 와서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쫄복 미니 사이즈의 복어다. 일반 복어의 1/3, 1/4 크기의 작은 사이즈인데 식감이 좋고 고소하다. 이 쫄복으로 갖은 양념과 매콤하게 끓여낸 탕은 진성 밥도둑이었다. 쫄복탕을 필두로 식당에서 직접 만드는 장아찌, 나물, 회무침, 꽃게무침 등의 화려한 밑반찬들까지. 수백 개의 굴비 수산 집과 화려한 간판이 달린 한정식 집보다 쫄복탕 집이 더 기억에 남는다.


법성포에서는 잘 먹지 않았던 굴비는 읍내에서 주로 먹었다. 특히 보리굴비를 무척 사랑했다. 영광에 있을 당시 나는 한창 하던 게임 닉네임을 '보리굴비'로 짓기까지 했다. 날이 더워질 무렵이면 우리 팀의 Y과장님께선 입맛도 없는데 보리굴비나 자시러 가는 게 어떠냐 제안하셨다. 항상 반가운 제안이었다. 보리굴비를 먹으며 여름날 기운을 되찾곤 했다. 우리 지사에서 자주 가던 곳의 보리굴비는 비린내도 전혀 없고, 살은 통통하고 부드러웠다. 큼지막한 보리굴비 살 한 점을 흰쌀밥에 올려 각얼음이 동동 떠있는 녹차물에 말아 와앙 한입 먹으면 온몸에 생기가 돌았다. 이 식당에서 밑반찬으로 나오던 잘게 찢은 고추장굴비는 자칫 심심할 수 있는 보리굴비 곁을 매콤 짭조름하게  지원사격 해주는 콤비였다.


보리굴비를 팔던 위 식당에서는 덕자조림이라는 요리도 있었다. 덕자 역시 영광에 와서 난생 처음 들어보는 생선이었다. 덕자는 쉽게 말해서 큰 사이즈의 병어라고 볼 수 있다. 덕자조림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 생생하다. 말도 안되게 큰 사이즈의 생선을 매콤하고 감칠맛나는 양념에 자박자박 졸여낸 귀한 음식이었다. 덕자를 앞접시에 옮겨담고 후후 불며 소주를 기울였다. 덕자를 다 먹고선 남아있는 국물에 밥을 비벼먹으면 게임 끝이었다. 가격대도 꽤 있는 음식이다 보니 자주 먹진 못했으나 한번씩 날씨가 쌀쌀하고 몸이 허할 때 덕자조림을 떠올리면 군침이 돈다.

식당에서 팔던 덕자조림

 이 식당은 보리굴비, 덕자찜 할 것 없이 너무나 맛있다보니 영광 홍보대사로서 영광을 찾는 지인들에게 유일하게 빠짐없이 추천해준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타지역으로 떠나고 얼마 후 사장 내외분의 가정 불화로 인해 폐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무척 안타까워했다.



영광에서 수도권으로 발령받아 올라올 때 지사 선배들이 했던 말이 있다. 위에 올라가면 맛있는 거 많이 없을 거라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웬만한 맛집들은 서울에 포진해 있었고, 음식의 종류도 다양했다.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기엔 읍내 골목이나 짠내가 물씬 나는 법성포보다는 서울 시내 번화가와 민물 내음이 나는 한강공원이 좋았다. 다만 영광에서 먹었던 음식들에서 비롯되는 추억의 깊이와 그 지방에서만 먹을 수 있던 특별한 음식들은 위로 올라와선 찾기 힘들었다. 영광에서 근무한 덕분에 동료 선배들과 차를 타고 국도를 내질러 숨겨진 맛집에 갈 수 있었고, 보리굴비에 녹차물을 말아먹으며 기운을 차렸고, 난생 처음 본 음식들을 접하며 미각의 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회식 자체는 100% 즐길 수는 없었지만, 직장 동료 선배들과 미식 생활을 한 덕분에 지방에서 근무하던 시간들이 한결 더 수월했고 기깔날 수 있었다.


https://brunch.co.kr/magazine/workinruralarea



이전 07화 색소폰 연주를 들으며 낮잠을 잔다는 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