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을 헤치고 출근한 지사에서의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선배들 한분 한분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배치받은 뒤, 미어캣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색하게 앉아있으며 시간을 보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나 잠은 어디서 자는 거지..??’
당장 옷가지와 세면도구 정도만 들어있는 캐리어 하나와 멘탈 바사삭된 육신이 지낼 거처가 궁금해졌다. 다행히도 나 같은 무연고자들을 위해 사측에서는 사택을 임대하거나 매입해서 운용 중이었다. 사택이라는 단어는 군대 시절 부사관들과 장교가 지내던 ‘관사’를 떠올리게 했다.
군 장교 및 부사관들의 독신자숙소(일명 BOQ)의 전형적인 모습
대대장님 정도 돼야 가족들이 거처할 수 있는 별도 관사가 제공됐고 그 밑으로는 위 사진과 같은 시설에서 장교 부사관들이 살고 있었다. 사택도 왠지 관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관사와는 달리 놀랍게도 우리 지사의 사택은 ‘아파트’였다. 대학교 시절 내내 원룸을 전전하던 내게 그동안 고생했다고, 비록 영광으로 왔지만 날 어여삐 여긴 하늘의 선물인가 싶었다. 하지만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선물포장을 풀어보니 원하던 내용물이 아니었다.
‘oo 씨 들어가실 곳에는 지금 A과장님이 혼자 살고 계세요. 거기에 있는 빈방에서 지내시면 될 것 같아요’
너는…과장님과…함께…지내게…될…것이다
지사 총무담당 선배의 고지가 귓전에 울려 퍼져왔다. 난 과장님과 함께 지내야 될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cf. 사택은 현실상 혼자서 쓰기 어렵다. 단신으로 부임한 직원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2명, 많게는 3명까지 한 곳에서 지내게 된다. 가족까지 같이 오는 경우에만 온전히 사택 하나를 제공받을 수 있다.)
직장 상사와의 동거라니. 대학교 다닐 때도 친구들과 같이 지내는 게 불편해 혼자서만 자취했는데, 생판 처음 보는 과장님과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한다니. 단 하루 만에 나의 삶은 스펙터클하게 변해버렸다. 당장 시골에서 자취방을 구할 수도 없었던 터라 현실을 받아들이고 퇴근 후 캐리어를 질질 끌며 사택으로 향했다. 사택은 지사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1동짜리 복도식 아파트였다. '우와 직주근접성은 최고네 개이득ㅎㅎ' 긍정적 자기 암시를 하며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에 들어섰다. 방 3개에 화장실 1개가 있는 21평 정도의 전형적인 2 bay 구축 아파트 구조였다. 연식에 비해 내부는 꽤 깔끔했다.
내가 묵게 될 방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있었다. 아파트 복도 쪽으로 직사각형의 창문이 나있는 세평 남짓한 조그마한 방이었다. 짐을 풀고 집안을 둘러봤다. 거실엔 노란 마루바닥 위에 황갈색 TV장과 그 위에는 연식을 알 수 없는 조그만 검은색 브라운관 TV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거실과 붙어있는 부엌 또한 별게 없었다. 꽤 상태가 좋은 냉장고 한대와 앤티크함이 물씬 풍기는 식탁뿐이었다. 식탁 한켠에는 과장님이 드시는 걸로 추정되는 각종 영양제가 한가득 놓여있었다. 이외에 최소한의 가재도구만 갖춰져 있는, 미니멀한 컨트리사이드의 사택이었다.
칙칙하고 올드한 주방,거실과 달리 화장실은 깔끔하고 최신식이였다. 내가 들어오기 얼마 전 리모델링을 한 덕분에 비즈니스 호텔 수준으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화장실의 환한 불빛과 매끈한 타일바닥이 내게 위로를 건네는 듯 했다. 씻을때만이라도 행복하라며.
짧은 사택 투어를 마치고 이제는 내방이 된 공간으로 돌아와 털썩 앉아 방안을 쓱 둘러보았다. 문득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여진 시>가 떠올랐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六疊房)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중략)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창밖엔 아파트 복도가 펼쳐진 육첩방. 우리나라지만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전남 영광의 사택 육첩방에 내 몸을 누이며, 나는 나에게 위안을 건네야만 했다. '야, 너도 사택에서 잘 살 수 있어.' 그렇게 외딴 동네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야, 너두 살 수 있어
입사 초반이다 보니 동기들과 사내 메신저로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사택은 동기들 사이에서 주요 이슈였다. 난 (광주) 수도권으로 발령받았다며 부러움을 받았는데, 내 사택 또한 동경과 부러움과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무려 사택이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동기들 대부분이 연립주택이나 오래된 빌라에 있는, 군대 관사 같은 건물이 사택이었다.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육첩방이 주니어 스위트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참 간사하다.
육첩방에 살아갈 운명에 감사하고 수긍하며 점점 적응해갔다. 조그마한 간이 테이블과 싱글 침대 하나를 들여놓으니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지만 사람 사는 방 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갬성을 더하기 위해 서울에 놀러갔다가 사온 포스터도 구매해 벽에 붙여보았다. 육첩방은 구색을 갖춰갔다. 하지만 허용된 자유의 크기는 딱 세 평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어찌 됐든 혼자 사는 사택(私宅)이 아닌, 회사에서 제공해준 사택(社宅)에서 직장상사와 함께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 지내시던 과장님은 무척 깔끔하고 부지런하셨다. 내게 별다른 간섭도 없으시고 회사에서도 항상 친절히 대해주셨던 큰아빠 같은 분이었다. 가족 같은 회사는 아니더라도 이런 분이 가족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같은 공간에서 상사와 함께 지낸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회사까지 도보 5분이라는 넘사벽 직주근접성을 갖춘 덕분에 8시가 넘어서까지 자고 일어나도 여유 있게 출근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난 보통 아침 7시 전후로 잠에서 깼다. 과장님께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시고 식사를 챙겨 드신 뒤 운동하러 나가셨다. 과장님께서 분주하게 아침을 맞는 소리에 항상 눈이 떠졌고, 사택에서 나가실 때까지 조용히 뒤척이며 아침을 보내야 했다.
퇴근 후엔 더 눈치를 봐야 했다. 시골에서 워낙 할 게 없다 보니 게이밍 노트북까지 구매해 육첩방에서 게임을 몇 달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오버워치라는 게임에 푹 빠졌었다. (영광군민답게 게임 아이디는 ‘보리굴비’였다.)
내가 쓰던 게이밍 노트북
헤드셋을 끼고서 우리편과 의사소통하며 플레이하는 게임인데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었다. 안방에서 주로 프로야구를 보시며 휴식을 취하던 과장님 방으로 보리굴비의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게끔 헤드셋 마이크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게 답답해져 결국엔 걸어서 10분 거리의 피시방에 종종 가게 됐다. 읍소재지라 최신사양의 피시방이 있던 덕분이었다. 이렇게 피시방에 가고 육첩방에서 쉴 수 있는 저녁은 감사할 따름이었다. 퇴근하고 사택에 가면 할 게 없을 신입사원을 생각해주는 따스한 선배님들의 배려 덕분에 평일 저녁 ‘식사’ 자리에 대부분 참석해야만 했다. 식사는 높은 확률로 음주로 이어졌고 귀가시간은 늦춰지기 일쑤였다.
식사가 아니라 처음부터 회식으로 시작하는 날엔 더했다. 회식 공지는 대개 당일날 이뤄졌다. “퇴근하고 뭐 없제?”라는 선배님들의 질문에 뭐 있다고 대답하면 반문이 돌아왔기 때문에,뭐없는저녁엔 회식에 참석해야만 했다. 2,3차까지 회식이 이어지고 나선 대학 시절이 오버랩되는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학교 근처에서 늦게까지 술 마시다 술집들이 문 닫고 갈 데가 없을 때 친구들과 한잔만 더하자며 자취방에 가던 그 모먼트가 말이다. 학교 친구들 대신 이제는 회사 상사님들과 읍내에서 함께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2,3차까지 한 뒤 그놈의 '딱한잔'만 더하기 위해 종종 사택으로 향하곤 했다. 회사 사람들과 온종일 더불어 정을 나누는 소사이어티였다.
지사에서는 업무를 배우느라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사택살이도 어찌어찌 적응해갔다. 하지만 퇴근 후 찾아오는 무료함과 이벤트성 식사, 회식자리는 쉽게 적응하기 어려웠다. 나는 이 둘과 스파링을 쎄게 붙기 위해 팔소매를 걷고 한 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이 선택으로 이어지는 결과가 어떨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