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암담한 상황들을 돌이켜볼 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대학원이 아니라 밤아 옆이었다. 과거의 자존감 높았던 내 자아를 내려놓고 철저히 밤아 옆에 붙어서 밀착 케어를 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내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병원에서 고도난청이라고 했지만, 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심지어 의사 진단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이한테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아직 말할 때가 되지 않아서 입을 열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며 굳이 내 스스로를 거짓으로 합리화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못 듣는 아이가 확실했다.
아파트에 실내 놀이터가 하나 있었다. 그 실내 놀이터 안에는 창틀 쪽으로 아주 작은 아이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너무 좁은 공간이라 청소도 못하고 먼지만 가득한 곳이었는데, 아이들은 ‘굳이’ 그 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참 좋아한다. 우리 밤아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 따라 우르르 그 곳으로 들어가서는 친구들이 나와도 밤아는 나올 줄을 모른다. 혼자 놀만큼 다 놀고 지쳐야 겨우 나온다. 환장할 노릇이다. 그 곳을 막아 버리고 싶다.
어느 날, 실내 놀이터에서 밤아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아이들이 그 좁은 공간에 들어갔다가 “악” 소리를 내며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죽어가는 벌 한 마리가 마지막 힘을 다해 살기를 애쓰고 있는 중이란다. 그런데 갑자기 밤아가 그 곳으로 들어갔다.
‘아 제발, 들어가지 말아줘.’
내 마음이 밤아에게 전해질 리 없었다.
“밤아야! 안 돼. 들어가지마. 어서 나와. 거기 벌 있어!”
나는 듣지 못하는 아이에게 소리쳤다. 평소 같으면 놀이터의 좁디좁은 통미끄럼틀을 같이 타는 한이 있어도 내가 직접 몸으로 움직이지만, 이 실내 놀이터의 창틀 공간은 내 허벅지 한 쪽도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라 아이 따라 들어가서 손 붙잡고 끌고 나올 수도 없고, 내 속만 타 들어갔다. 다급하게 소리치는 내 목소리를 주변 아이들이 듣고 함께 소리쳐줬다.
“밤아야! 빨리 나와~ 거기 벌 있어! 벌 움직여!”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고 밤아가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옆에 아이에게 ‘니가 좀 들어가서 밤아를 데리고 나와줄래?’라고 말하며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아무리 죽어가는 벌이라도 위험한 상황이라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아무런 대책 마련도 못하고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아이들이 갑자기 “꺅”하며 소리를 질렀다. 우리 밤아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벌을 손으로 잡아서 나오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벌의 날개 소리가 들렸다.
‘오 마이 갓’
구경하던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고, 엄마인 나도 소리를 질렀다. 영문을 모르는 밤아는 ‘내가 이거 잡았다.’라는 승리의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었다.
맞다. 우리 밤아는 못 듣는 게 확실하다.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의사의 진료는 확실했고, 밤아는 청각장애가 맞다. 죽어가는 꿀벌 한 마리가 다시 한 번 일깨워준 변함없는 팩트이다. 인정해야 한다.
엄청나게 비싼 인공 와우 수술을 하는 데 건강보험 적용을 받으려면 보청기를 3개월 이상 착용한 이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보청기’란 어르신들이 노화 현상으로 겪게 되는 난청에 대한 보조기기였지, 갓 돌 지난 아기가 사용하는 의료기기가 결코 아니었다.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듣는 밤아를 키운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이 어린 아이의 귀에 보청기를 끼워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어린 아이가 보청기를 착용하면 사람들이 쳐다볼 것이라는 나의 청각장애에 대한 잘못된 편견, 그리고 ‘내 아이의 귀에 보청기를?’이라는 오만함이 나를 또 한 번 거짓된 삶으로 인도했다.
남들은 생후 10kg만 되면 바로 받을 수 있는 인공 와우 수술을 밤아가 18개월 정도에 받는 것도 이미 늦었는데, 나는 또 한 번 수술을 미뤘다. ‘미숙아로 태어나서 아직 귀 기관들이 안 열린 것이다.’, ‘급한 마음에 전신 마취했는데, 난청 아니면 어떡하지?’, ‘저번에 아빠 목소리 들은 것 같았어.’ 등의 바보 같은 생각과, ‘기적이 일어날 거야.’ 같은 예수님 공생애 시절에나 가능했던 기대를 하며 일단 더 기다려보자는 어리석은 선택을 또 했다.
그리고 듣지 못함으로 인해 따라오는 수많은 위험한 상황들에 대비해 24시간 집중 케어를 하기 시작했다. 이 ‘위험한 상황’이란 자동차소리 같은 것을 듣지 못해 생기는 위험도 있겠지만, 누군가 밤아를 불렀을 때 대답 없는 밤아 대신 “밤아야~ 선생님이 밤아 부르시네~ 대답해야지~~~.” 하는 나의 ‘위장 대답’도 포함되었다.
이렇게 나는 밤아를 24시간 케어하는 선택을 했고, 밤아 대신 대답하고, 밤아 대신 행동해주는 거짓된 삶을 살면서 ‘청각장애’를 제외한 밤아의 나머지 인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