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결의 방문이 쾅 닫혔다. 엄마는 여전히 거실에서 보이지 않는 은결을 향해 소리 지르고 있었다. 진로, 계획, 현실적인 선택. 그 단어들이 머릿속을 긁어댔다. 은결은 숨을 몰아쉬며, 방 한가운데를 멍하니 서성였다. 첼로는 구석에 있었다. 이제
“음악으로 대학 가는 건 비현실적이야. 수학 성적도 나쁘지 않은데, 굳이…”
굳이? 은결은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침묵 끝에 터져 나온 말은 생각보다 컸다.
“그럼 왜… 지금까지는 아무 말 안 했어?”
거실로 나와 엄마를 바라봤다. 아빠는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왜, 이제 와서? 내 연습, 내 대회, 내 시간 다 보고도—이제 와서 왜?”
엄마는 차분하게 말하려 했지만, 눈빛은 단호했다.
“이제는 결정해야 할 때니까. 고집부릴 시기는 지났어.”
결국 은결은 집을 나섰다. 연습실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
늦은 밤. 연습실은 비어 있었다.
은결은 불도 켜지 않은 채 구석에 앉았다. 핸드폰을 꺼내 손에 쥐었지만, 하연에게 연락할지 말지 망설였다. 손끝이 떨렸다.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같은 말조차 꺼내기 어려웠다.
몇 번이고 화면을 켰다 껐다.
결국, 짧게 보냈다.
- 나 지금 연습실이야.
---
그리고 20분쯤 지났을까.
문이 열렸다. 하연이었다. 숨이 약간 가빴고, 가방은 왼쪽 어깨에 겨우 걸쳐 있었다.
“있었네? 다행이다!”
가쁜 숨을 고르며 하연이 연습실로 들어섰다. 아무런 말없이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은결의 곁에 앉았다. 불을 켜지 않아 서로가 희미하게 보였지만, 그 어둠이 오히려 편안했다.
“무슨 일 있었어?”
은결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첼로를 바라봤다. 늘 함께했던 악기가 그날따라 무겁고 낯설었다.
“… 나, 오늘 진짜 도망치고 싶었어.”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고 은결이 고개를 떨구었다. 하연은 그런 은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계속 참았는데… 엄마가, 갑자기 진로를 정하래. 의대나 공대. 첼로는 취미로도 과하대. 그동안 다 지켜봐 놓고… 이제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은결은 입술을 깨물었다. 흔들리는 눈빛이 어둠에서도 보이는 듯해 하연의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아파왔다.
“난, 그냥… 네가 좋았고, 첼로가 좋았는데. 그게 뭐가 잘못된 거야?”
은결의 힘겨웠을 시간이 느껴진 하연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꿀꺽 삼키고, 조용히,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잘못이 아니야.”
은결이 돌아봤다.
“잘못 아니라고. 너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사는 거. 그거, 아무도 네 삶을 대신 책임지지 않아.”
담담하게 말하는 하연의 목소리가 은결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은결의 숨이 깊어졌다
그때, 하연이 그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아주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혼자 무너지지 마. 나도 있잖아.”
은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시간 무거웠던 무언가가, 그 순간 조금씩 내려앉았다.
---
그날 밤, 연습실 창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은결은 첼로를 꺼냈다. 활을 올리진 않았지만, 마음만은 그 위에 손을 얹은 것처럼 조용히 울렸다.
그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약속이었다. 다시 무너질 날이 오더라도, 한 사람은 옆에 있으리라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선,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