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무너지는 밤

너만은 나를

by 에벌띵

은결은 복도 끝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였다.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떼려던 하연은 멈칫, 제자리에 서고 말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은결의 머리가 흩어졌다. 그 바람을 따라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해 보이는 은결을 소리 내어 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짧은 이 시간이 은결에게 주어진 유일한 휴식일 거라 느껴졌다. 위태하지만 고요한 그 틈을 깨고 싶지 않아 돌아섰지만, 은결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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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간, 은결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교사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은결아, 너는 진로 생각해 봤니? 이과 쪽인가?"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은결에게 집중됐다. 은결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교사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시선은 잠시 은결의 무표정한 얼굴 위에 머물렀다.


쉬는 시간, 친구 민석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야, 너 요즘 왜 이렇게 멍해? 우리 과외 선생이 너네 엄마랑 통화했다던데?"


은결은 별말 없이 가방에서 물병을 꺼냈다.


"진짜 음악 계속할 거야? 너네 엄마 진짜 화나셨다더라고."


민석은 농담처럼 툭 던졌지만 은결은 웃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뚜껑을 열고 물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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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이제 그만 좀 현실 좀 봐.”


엄마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도, 낮지도 않았다. 식탁 위에는 아직 김이 나는 반찬들이 놓여 있었고, 아버지는 말없이 국을 뜨고 있었다.


“입시설명회 얘기했지? 음악 한다고 계속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은결은 말이 없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아무것도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가 거기서 1등이야? 아니잖아. 그냥 네가 잘하다고 착각하는 거지. 언제까지 그럴 거야.”


아버지는 젓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엄마의 말에도, 은결의 침묵에도. 은결은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조용히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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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 첼로 케이스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윤을 그렸다. 은결은 그 앞에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계단 아래서, 자신을 보던 하연의 눈빛이 떠올랐다. 말없이 바라보던, 어쩌면 조금은 걱정스러운 그 표정. 그 시선 하나가, 오늘 하루 중 유일하게 자신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처럼 느껴졌다


첼로 케이스를 열까 하다, 은결은 다시 덮고 불을 껐다. 지금은 고요가 필요했다. 어둠 속에서 그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그 애만은, 자신이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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