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쪽, 작은 골목 끝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하연은 지인의 추천으로 그곳에서 열리는 소규모 실내악 공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피아노와 첼로, 바이올린, 그리고 전자사운드와 함께 하는 새로운 형식의 협업이었다.
리허설 전, 공간에 깔리는 사운드를 들으며 하연은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많이 들은… 낯설고도 익숙한 음향이, 공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잔잔한 바람소리,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녹아든 어떤 낮은 숨 같은 감정.
“여기 사운드는 누가 맡으셨어요?” 하연이 묻자, 스태프가 답했다.
“류은결 디자이너요. 이번엔 ‘잊힌 풍경’이라는 테마로 사운드 아트 구성했어요. 곧 올 텐데.”
그 말에, 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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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은결이 리허설 공간에 들어섰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그는 여전히 어딘가 조심스럽고 조용했지만,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무너질까 두려워하던 소년은 사라지고 심지가 단단해진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연이 아무 말 없이 은결을 향해 손을 들자 은결은 미소 지었다. 그건 오래전, 연습실 한구석에서 마주쳤던 그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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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난 밤, 둘은 건물 옥상에 놓인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아무 말 없이, 여름 밤바람을 맞았다. 침묵을 먼저 깬 건 은결이었다.
“그렇게 떠나고도 음악을 포기할 순 없었어. 부모님 뜻에 따라 의대는 어떻게 들어갔지만, 매일이 괴로웠어. 본과 올라가기 전 자퇴하고, 집에서 쫓겨났지. 그 길로 다시 아르바이트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러다 이 길로 들어섰는데 숨이 쉬어지더라. 첼로가 아니라도... 음악은 계속하고 있으니까. 그게, 나니까."
은결의 조용한 고백에 하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은결이 통과한 삶이 어땠을지, 솟구치는 감정이 가슴을 지릿하게 했다.
“그때 너한테 했던 말, 기억나?” 하연이 물었다.
“시간 좀 걸려도 괜찮냐고?”
“응.”
하연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은결에게 건넸다. 직접 쓴 악보였다. 섬세하고 고요한 시작. 첫 프레이즈만 적혀 있었다.
“우리, 이걸로 다시 시작할래?”
악보를 받아 보던 은결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연을 곧게 바라보는 은결의 눈이 붉었다.
"응. 나도 이제는, 같이 걸을 준비가 됐어."
은결의 결연한 답에 하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연과 은결의 음악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는 흩어진 조각이 아니라, 함께 맞춰가는 선율로.
사랑도, 그렇게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