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편, 하연은 조용히 손끝을 맞잡고 서 있었다. 가벼운 숨을 내쉬고 또 들이쉬며, 방금까지 조율한 바이올린의 온도를 기억하려 애썼다. 공연장은 점점 관객으로 채워지고 있었고, 로비 너머로 익숙한 얼굴들이 지나갔다. 그들 틈 사이엔, 자꾸만 시선이 멈추는 빈자리가 있었다.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 서로의 궤도에서 멀어졌다고 하연은 생각했다.
“하연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하연이 체념으로 고개를 떨군 순간이었다.
익숙하고, 낯설고,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이름을 가진.....
하연은 천천히 돌아섰다. 거기, 은결이 서 있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하연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깊고 짙은 눈동자가 곧게 하연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처럼
은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하연을 살폈다.
“많이 컸네.”
하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숨을 고르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가 이 자리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듣고 싶었어. 지금 넌 어떤 연주를 할지.”
낮고 묵직한 은결의 목소리가 현실 같지 않았다.
“그래서 왔어. 그 이유만으로도 될까?”
하연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자리는 늘 비어 있었어.”
그 말에 은결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숨을 쉬게 된 사람처럼.
“난... 도망쳤어.”
그가 조용히 말했다.
“너를, 나를, 그리고 음악까지.”
하연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는 그래야 살 수 있었잖아. 나도 마찬가지였고. 뜻대로 살기엔 우린 너무 어렸어.”
은결이 무언가 더 말하려다 멈췄다. 그들은 서로를 오래 바라보았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무대 진행 스태프가 하연을 불렀다.
“하연 씨, 준비해 주세요.”
하연은 바이올린을 들어 올리며 은결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그 눈빛은 예전보다 단단했고, 동시에 부드러웠다.
“내가 오늘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는 건… 네 덕분이야. 그건 변하지 않아.”
은결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여전히 빛나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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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은 무대 위로 올랐다.
혼자 서는 건 익숙한 일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첼로가 채웠을 자리를 하연은 바이올린 선율로 아름답게 채워갔다.
그 소리는 처음엔 혼자였고, 그러다 점점 무언가를 품는 소리로 바뀌어갔다. 사라졌던 이름과 남겨진 마음, 말하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
하연은 연주를 마친 뒤 잠시 고개를 들어 객석을 바라봤다. 빛이 어두워 누가 앉아 있는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 익숙한 인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용히, 분명히, 그 자리에 은결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