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맞닿을 시간

by 에벌띵

하연은 인터뷰 후에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명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기자는 그녀가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고, 하연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이렇게 대답했다.


“음... 가끔은, 말없이 응원하던 마음이 더 오래 남는 것 같아요. 제게 사랑은 그런 게 아닌가 해요.”


기사는 바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몇 주 뒤, 그 말은 짧은 문구로 발췌되어 SNS에 떠올랐고, 음악계에서 조용한 화제를 모았다.


어느 밤, 은결은 사운드 편집실에 홀로 남아 후반 믹싱을 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에 삽입할 소리를 고민하다 잠시 손을 멈춘 그는, 무심코 핸드폰을 켰다가 그 문장을 발견했다.


'말없이 응원하던 마음이 더 오래 남는 것 같아요.'


그는 한참을 그 문장 앞에 머물렀다. 하연의 인터뷰였다. 익숙한 문장, 익숙한 어조. 그의 마음 어디쯤, 오래도록 닫혀 있던 무언가가 살짝 기울었다.


그는 조용히 이어폰을 꺼내 들었다. 하연의 앙코르 연주였던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가 귓속에 흘러들었다. 음 하나하나가 당시의 숨결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은결은 더 이상 첼로를 연주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음악의 결을 기억하며 소리를 설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영상 속 감정을 가장 깊게 울리는 순간을 찾아, 가장 적절한 소리를 입히는 것. 은결은 그 일을 사랑했고, 매 장면마다 마음을 담았다


그의 작업 공간 한쪽, 아직도 그녀와 함께 연습했던 낡은 악보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그는 매번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짧은 숨을 고르곤 했다.


하연도 마찬가지였다. 무대 위의 조명 아래선 담담했지만, 그녀의 마음 어딘가는 여전히 조용히 반응하고 있었다. 때로는 음악보다 더 섬세한 기억들이, 연습실의 공기처럼 살아 움직였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채,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견디고, 감정을 다듬고, 음악처럼 조용히 사랑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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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카페의 창가. 햇살은 유리창 너머로 비스듬히 기울고 있었다.

하연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눈앞의 은결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청년이 되어 있었고,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진심을 담고 있었다.


은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주로 자연음 샘플링해. 물소리, 바람소리… 소리라는 건 참 묘하지. 없어지지 않고, 어딘가에 머물러 있거든.”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너다운 일을 찾았구나? 첼로만큼 어울려."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음악이 잔잔히 흐르고, 그 사이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배경처럼 흘렀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조용해진 듯, 둘만이 존재했다.


은결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때, 네가 준 그 악보 아직도 내 작업실에 있어.”


하연은 눈을 크게 떴다가, 작게 웃었다. “나도. 네가 마지막으로 연습하던 프레이즈, 지금도 기억나.”


말을 잇지 않아도 되는 순간. 이제는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닿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날, 헤어지며 은결이 말했다.


“시간 좀 걸려도 괜찮을까?


하연은 대답 대신 가방을 들어 어깨에 메고 조금 멀어진 거리에서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그래.”


햇살이 다시 기울었다.

둘은 다시 같은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음악처럼, 어긋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길 위에서.

그들은 각자의 삶을 지켜냈고, 그 안에서 서로를 떠올렸다.


모든 감정이 다 지나간 후에도,

다시 마주한 순간—

웃음보다 먼저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으리란 걸,


그들은 알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한때보다 더 조용하게 사랑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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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