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수능 같았던 6모가 끝나니…
“엄마~! 엄마 꺼 운동화 어딨어?”
“어, 거기 오른쪽 신발장 중간에 하얀색!”
“… 아닌데… 하얀색…“
그러고 보니 진짜 그렇네. 더 이상 하얀색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내 흙색의 닳은 운동화를 꺼내 신으며 아이는 몸에 모기 기피제를 칙칙 뿌리고 집을 나섰다.
온종일 사시사철 슬리퍼만 끌고 다닌 아이라 신고 뛸 운동화가 있을 리 만무하다. 아니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난데없이 11시가 다 된 이 시간에 운동화는 왜 찾는 건데? 거두절미하고 작심삼일 일수도 있으니 일단은 내 운동화를 신고 달릴 거란다. 흠... 우리 고사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6모가 끝나고 담임쌤의 예언처럼, 신기하게도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그 순간이 역시나 우리 딸에게도 왔다. 이유 없이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다는, 이름하여 고3병. 참으로 다양하고 참신한 병이 발병한다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아이에게는 고사미의 클리셰, 신경성 위염이 찾아왔다.
원래도 소화기 계통이 원활하지는 않았다. 내가 물려준 유전적 성향의 탓도 있는데, 그래서 더욱 신경성 위염은 그러려니 넘겨지지 않았다. 고통스러울 것을 내가 제일 잘 알기에.
위장계통이 안 좋으니 소화제며 제산제며 위장관 조절제까지 상비약으로 온갖 약들을 종류별로 넣어가지고 다녔는데, 그 모든 약들이 듣지 않는 때가 온 거다. 하긴 나도 겪어봤지만 고사미의 위장병은 약이 없지 않나.
약을 먹어도 안되고, 식사를 더 줄이자니 기운이 딸리고 해서 고육지책으로 생각해 낸 방법이 달리기란다. 몸을 움직이면 좀 나을까 싶어서라나. 하루종일 앉아만 있으니 위장이 꼬이는 것 같다며 야자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는 나갔던 것이었다.
처음엔 갑자기 왜 저러나, 왜 난데없이 체육복을 찾아 입고 나가는 걸까 살짝 궁금하긴 했지만 별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몸에 좋다는 건 다 먹고 싶은 것이 중년이듯이 고3에게 좋다는 건 또 다하고 싶은 것이 수험생이 아닐까 싶어, 또 어디선가 체력이 좋아야 고3을 버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했다.
어라... 그런데 이게 지금 벌써 일주일째다. 작심삼일은 가뿐히 넘긴 것 같고 중단의 위기가 올 법도 한데 아직까지는 10시 30분 귀가하자마자 체육복을 입고 나간다. 그뿐인가! 땀을 흘렸으니 집에 돌아와서 바로 씻으러 들어가기까지. 이런 효과까지는 생각도 못했는데 너무 좋아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하루종일 학교에서 공부했으니 조금 쉬다 씻고 자겠다는 것이 (그게
새벽 2시) 우리 딸의 확고한 루틴이었는데 그 철옹성 같던 루틴을 스스로 깨버린 거다.
대부분 청소년이 있는 집, 그중에 수험생이 포함된 집은 밤 11시가 되어도 초저녁 같은 분위기다. 학원에서 온 아이들이 간식을 먹고 이야기하고 씻고 그렇게 하루를 정리하느라 분주한 시간. 그 시간세팅에 익숙해져 나도 저녁 설거지가 그 시간쯤 끝이 난다.
그날따라 느릿느릿 설거지를 마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는데, 문득 딸이 운동 끝내고 올 시간이 된 거 같아 앞치마 차림으로 집 앞 소공원에 마중을 나갔다. 대낮만큼 환한 불빛에 운동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중에 내 눈에 띄는 오직 한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내 딸이다. 다 달렸는지 한쪽 어깨를 돌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어머나 멋졌다. 이를 어째. 반하겠네.
"운동 다 했어? 멋지다~ 우리 딸~. 막 이렇게 팔도 돌리고~"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말을 건넨 엄마한테 놀랐는지, 팔 돌리는 흉내를 내며 멋지다는 찬탄을 쏟아내서 그랬는지 멋쩍게 웃어주는 딸이다. 고사미의 웃음은 귀하기도 해서 웃어만 줬는데도 고마웠다.
간만에 딸과 도란도란 걸어오는 길에 왜 운동을 하느냐 물어보았다. 일주일 동안 하는 걸 보니 시작에 진심인 건 알겠는데 이유가 궁금했다. 다행히 수험생 엄마 짬밥이 생겨, ‘체력 관리하는 거야?’ 라며 넘겨짚지는 않았는데 나온 대답이 그거였던 거다. 위장병.
"엄마, 친구들이 고3에는 운동하는 거 아니라고, 약물 투혼 해야 한다고 말렸는데 약도 안 들어서 시작했어."
이 약은 먹어봤느냐 저 약은 먹어봤느냐 걱정하다가, 힘들었겠다 대단하다 기특하다라는 칭찬으로 넘어가니 아이가 줄줄 이야기를 시작한다. 간만에 아이가 나에게 마음을 열어준 거 같아, 힘들지 않냐고 버틸만하느냐고 물었더니 힘이 든단다.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매일 운동하다 보면 수능 때까지 버틸 힘이 생길 거라며 응원해 주다가 마침 옛날 일이 떠올랐다.
남녀노소 누구나 싫어한다는 그 라떼~ 이야기. 바로 엄마의 고3 때 이야기였다. 시간만 나면 엎드려 자면서 근근이 버티며 살고 있었던 나와 달리 성적이 비슷했던 엄마 친구는 야자 전에 매일같이 운동화 갈아 신고 학교 운동장을 뛰었다는 이야기. 힘드니까 뛰지 말고 너도 자라는 나의 다정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나가는 그 친구를 엄마는 짠하게 보았다고. 그 짠함이 부러움으로 바뀐 건 수능 전 마지막 모의고사 때였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체력관리를 한 거였다는, 그런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를 신기하게도 내 딸이 들어주는 거였다. 하긴 마지막이 압권이었다.
"그 친구가 네 남매 중 막내였는데, 위로 언니 오빠 세 명이 대학생이었어. 연달아 수험생을 배출한 그 집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언니오빠들의 노하우가 쏟아졌는데 최고의 노하우가 ‘닥치고 체력관리’ 였던 거지. “
"맞아~ 엄마, 언니 오빠 있는 애들은 달라."
내가 첫째였다면 첫째의 고충으로 넘어가 대화가 더 진전되기도 했으련만 둘째로 살았던 나는 첫째의 고충을 내 딸만큼 알 수가 없어 이 대화의 마무리는 훈훈하게 여기서 끝이 났다. 어서 씻고 자라는 하나마나한 잔소리는 살짝 덤으로 얹은 채.
예전 같으면 이런 기회를 찬스로 삼아 '수험생에게 체력관리란' 하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운동화를 신은 뇌'를 필두로 당분이 기억력 감퇴를 촉진하니 당분이 가득한 음료나 단순당이 풍부한 빵류를 멀리해야 한다는 둥 생활전반에 관한 풍부한 잔소리로 모처럼 훈훈한 분위를 망쳐도 한참은 망칠만한 날이었는데 이번엔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사람이란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다는 보편적 진리를 깨달은 탓이기도 하고, 내가 고3이었던 시절에 운동화 신고 운동장 뛰던 친구 이야기를 한 두 번 해준 것도 아니었는데, 오늘 처음 듣는 얼굴을 하던 딸을 보니 다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낸 열아홉 인생에게 박수 쳐주는 것 이외에 무엇이 필요할까 싶었다.
옆에서 채근하지 않아도 우리 고사미에게 올 일 년은 많은 것을 참고 견디는 시간이 될 것이다. 유난히 하고 싶은 게 많아지는 나이, 하지 말라니까 더 하고 싶고, 보지 말라니까 더 보고 싶은, 공부 말고는 모든 게 너무나 다 재미있을 예쁜 나이. 그래서 괴로운 열아홉 고사미들.
그러니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는, 그저 올여름이 너무 무덥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냉장고에 항상 달콤한 수박을 챙겨놓는 부지런함과 매일 아침 좋은 말로 잠을 깨우는 다정함, 딱 그만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안전하고 평화로운 하루가 무사히 쌓이기를 가만히 기도하며, 유난히 더운 올여름, 자~ 알 나기를 온 맘 다해 응원한다, 우리 고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