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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불합격이 선생님 탓은 아니잖아요

9살 아이 코딩자격증시험과 한자시험 치른 이야기

by 레이첼쌤 Feb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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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을 나름대로 무사히 마치고 두 달간의 긴 겨울방학이 찾아왔다. 긴 방학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어떻게 하면 이번 방학을 이용해서 아이의 더딘 발달을 더 끌어올리고 한 단계 더 성장시켜 볼까 연구했다. 매일 해야 할 방과후와 학원스케줄을 꽉꽉 채워서 짜놓고, 매일 공부할 학습교재도 정해두었다.


그리고 고민 끝에 한자자격시험을 치러보기로 했다. 한자는 원래 유치원 시절부터 시각적 자극으로 인한 집착 도구 중 하나로 한창 좋아했었다. 하지만 주의력이 낮은 만큼 흥미도 그다지 오래가지 않기에 서너 개월 정말 미친 듯이 혼자 한자책을 보다가 어느 순간 벗어나고 말았다. 그래도 초등학교 정도 되니 주변에서도 슬슬 기본적인 한자 정도는 알아야 된다는 분위기고 있었고, 한자자격시험을 치르게 하는 엄마들도 있었다.


한자시험이 가뜩이나 사회성 부족으로 자존감이 위태로운 아이에게 그나마 성취감과 뿌듯함이라도 심어줄 수 있는 하나의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알아보니 8급, 9급 정도는 아이에게 너무 쉬운 수준이었고 6급 정도는 무난하게 통과할 수준인 듯했다.


그렇지! 이거야! 이번 방학에 이걸로 아이의 자존감을 한 번 세워주자고 호기롭게 결심했다. 한자자격시험도 알아보니 그 주관하는 재단도 다양하고 시험 날짜도 제각각이고 OMR 답안지 유형도 달랐다. 고민하다가 공신력은 좀 떨어지지만 주관식 문항이 없고 조금 더 쉽다고 여겨지는 <대한검정회> 재단에서 주최하는 한자자격 6급 시험에 접수했다.


한자책을 하나 사서 하루에 세장씩 풀렸는데, 한 달 정도 되니 기출문제까지 쉽게 진도가 나가서 더 준비할 것도 없어 보였다. 기출에서 백점을 맞지는 못했지만 두세 개 정도 일관되게 틀리는 걸 보니 기준 점수 70점 이상이면 합격이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험 2,3주 남겨두고는 되려 더 스트레스 주고 싶지 않아서 아예 풀리지도 않고 시험 이틀 전에 OMR 답안지 작성 준비도 해보고 기출도 한 두 개 더 풀려보았다.


아이는 다른 과목보다 한자를 꽤 좋아하는 편인데, 내 생각에는 그저 신기하게 생긴, 한글과 다른 모양의 특이한 그 글자들을 따라 쓰는 게 재밌어서 그런 것 같다. 국어나 독서처럼 따로 깊게 생각해야 할 사고력이나 추론력이 필요하지 않은 과정이다. 국어 독해교재를 풀 때는 항상 힘겨워하는데 한자를 할 때만큼은 자신감 있어 보였다. 그래, 그거라도 어디냐. 좋아하는 거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드디어 한자 자격시험 당일이 되었다. 우리 집에서 15분 정도 거리라 여유 있게 40분 전에 출발하기로 하고 진작 챙겼음에도, 일부러 시간에 맞춰서 나갔다. 하지만 시험장 근처에 다다랐을 때 나의 예측이 철저히 빗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시험장에 들어서는 1차선 도로가 꽉 막혀서 아예 움직이지를 않는 거다. 설마 이게 다 한자 시험장 가는 차들이라고? 사실이었다. 그 차들은 모두 나와 똑같은 행선지를 향해서 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한자 시험이 이렇게 핫한 거였어?


입실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차가 옴짝달싹 못하니 점점 초조해졌다. 이러다 입실도 못하고 시험조차 응시도 못하는 건 아닌가. 도로에 서있던 다른 차들에서는 운전하는 부모는 차에 있고 아이들이 도로 위로 바로 내려서 시험장을 향해 뛰어갔다. 아이가 좀 크다면 저렇게라도 하련만, 내 아들은 아직 어려서 혼자 도로 위를 질주하게 할 수도 없다. 게다가 시험장 안에 들어가서 고사실이 어딘지 확인할 줄도 모를 테니 말이다.


한창 차 안에서 고민하다가 시험장 주변에 주정차 금지구역, 견인구역이라고 써진 팻말 바로 앞에 차를 대놓고 아이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뛰어갔다. 입실 시간이 이미 지나버린 후였다. 고사장 건물 앞에 붙여진 시험실 안내 지도를 보고 미로 같은 복도를 돌고 돌아 경우 아이를 시험장에 데려다줄 수 있었다. 늦었지만 다행히 입실은 가능했다. 시험장에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시험 대형으로 앉아 있었다. 고사장 문 앞에는 응원하는 엄마들로 북적였다. 복도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지나가려면 비집고 가야 할 정도였다.


과히 이건 수능시험장을 방불케 하는 현장이었다. 한자 자격시험을 보는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도, 엄마 아빠 모두 총출동해서 아이를 응원하는 모습도, 시험장에 차 댈 데가 없을 정도로 주차난이 벌어지는 것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고사장 복도에는 아예 서 있지도 못하게 해서 건물 입구 쪽에 모든 부모들이 아이를 기다리면서 서있었다. 나중에는 관계자들이 시험 끝나고 아이들 내려오는 길에 바리케이드를 치면서 이 선 넘어오지 말라고 외쳤다. 시험이 끝날 시점이 되니 바리케이드 주변으로 수백 명의 학부모가 모여들어서 장사진을 이루었다.


문득 현타가 왔다. 나는 왜 여기에 무엇을 위해서 이러고 있는 것인가. 아니, 나를 포함한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무엇을 위해서 이토록 열성적으로 한자시험을 치르게 하는 건가. 아이를 키우면서 처음 경험해 본 나와 같은 시대에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학구열이었다. 수도권도 아닌 지방에서도 이 정도인데, 이름난 학군지에서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다행히 아이는 크게 긴장하지 않고 시험을 치르고 나왔고, 문제 한 개가 헷갈려서 찍었다고 했다. 잘했다고 무한 칭찬해 주고 할머니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고생했다고 아이를 격려해 주었다. 결과는 한 달 후에 나오지만 OMR 답안지 작성에서 밀려 썼다거나 실수가 있었을 수도 있으니 아직 결과는 속단할 수 없다.


이 한자자격시험 경험은, 내가 기대하고 예상한 것처럼 아이의 자존감을 회복시키는데 과연 도움이 됐을까? 성취감과 뿌듯함이 아이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밀려들어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을 키우는 데에 미약하나마 영향을 미쳤을까? 이보다 더 높은 급수 시험을 아이에게 또 치르게 해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그만둬야 하나.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 밀려들어왔고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한자 시험 이외에 이번 방학을 마무리하면서 또 하나 치르게 된 시험은 바로 코딩자격증시험이다.

애초에 코딩학원을 갈 때에도 아이가 너무 좋아해서 제발 보내달라고 해서 가게 됐는데, 반년 이상 나름 즐기며 다니던 중이었다. 안 그래도 시각 자극에 약한 아이에게 컴퓨터 교육이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싶었는데 워낙 본인이 적극적이고 흥미가 높으니 일단 인정해 주기로 했다.


방학이 시작될 때 원장님은 자격증 특강반 수업 수강을 제안하셨고, 아이가 어느 정도 실력이 있으니 특강 수업을 들으면 어렵지 않게 자격증도 취득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특강 수업료가 생각보다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아무런 목적성 없이 매번 코딩 수업만 듣느니, 자격증 취득이라는 목표를 두고 방학의 시간적 여유를 활용해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매주 금요일 오전 9시부터 3시간씩 일대일 지도를 받아서 자격증 대비 특강을 들었다. 원래 COS 3급 자격증을 준비했는데, 수업을 하다 보니 지도선생님께서 아이가 생각보다 이해력이 좋고 받아들이는 게 빨라서 2급을 도전해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고 하셨다. 아이 학년보다 조금 어려운 수학 개념이 나오긴 하지만 그 문제수가 적으니 나머지 문제만 다 맞아도 여유 있게 합격선에 들 걸로 예상된다고. 나야 자격시험 레벨에 대해 자세히 모르니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해보자며 동의했고, 그렇게 아이는 COS 2급을 준비했다.


수업할 때마다 선생님은 아이가 이미 준비가 다 되었고 시험도 어렵지 않게 통과할 것 같다고 여유로운 말투로 말씀하셨다. 되려 기출문제를 너무 빨리 다 풀고 시간이 남아서 아이랑 수학 문제를 풀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코딩 시험은 당연히, 너무나 쉽게 합격할 줄 알았고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시험 당일날 학원에 마련된 특별 시험장에 도착했고 시험이 시작됐는데 이상하게 우리 아이 컴퓨터만 로딩이 느려서 시험 사이트 접속이 잘 안 됐다. 결국 고사장 선생님과 이 컴퓨터 저 컴퓨터 계속 시도하다가 다른 친구들보다 한참 늦게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자기만 늦게 시작하고 이미 시험을 치르는 사람들이 보이는 게 긴장 요소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늦게 시작했어도 여유롭게 잘 보고 나올 아이의 얼굴을 한 치의 의심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의 얼굴이 벌게지면서 일그러지더니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코딩 시험 특성상 끝나자마자 바로 점수와 합, 불합이 화면에 뜨는데 아이는 아주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고 불합격이라는 단어가 크게 뜬 것이다.


너무나 당황했다. 아이가 불합격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자기 자신도 많이 놀라고 실망했는지 쉽사리 울음이 그치지 않아서 한참을 달래주었다. 선생님께 물어보니 기존 기출문제보다 조금 더 어렵게 출제된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해도 아이가 받은 점수는 합격선에서 한참 멀어진 수준이다.


겨우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집에 돌아오는데 그때부터 내 감정이 훅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건 아이에 대한 실망감인지 내가 느끼는 좌절감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부정적인 감정들이 뒤섞여서 갑자기 휘몰아치는 느낌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시험 준비해 주신 선생님이었다.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아이가 이해력도 빠르고 기출문제도 다 쉽게 잘 풀어서 시험은 쉽게 통과할 것 같다고 하셨던 그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옆자리에서 이제 막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 아이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 화가 났다.

아니, 수업료를 이렇게 많이 받아놓고 이게 지금 뭐야?

애 실패시키자고 내가 이 특강을 듣게 했던가?

안 그래도 자존감이 낮아서 힘든 아이인데 본인이 너무나 좋아하는 코딩분야에서 본 첫 시험에 이렇게 처참히 실패해 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약간의 망설임 끝에 지도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방금 시험 끝났는데, 아이 불합격했어요.. 실전 문제가 더 어려웠을까요? 원래 실전 시험이 더 어려운 건지요.. 아이가 실망이 커서 계속 울어요.."


시험 합격은 따놓은 당산인 것처럼 말했던 선생님을 향해 약간의 원망과 내 속상함을 더해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선생님도 꽤 당황한 듯했다.

"아.. 정말요? 수학 관련 문제가 많이 출제 됐나.. 기출은 잘 풀었었는데.."


"어머니, 죄송합니다."



갑자기 선생님께서 사과를 하시는 거다.

순간, 내가 실수했나 싶었다. 아이가 시험에 떨어진 건 선생님이 지도를 잘 못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실제 시험에서 너무 긴장해서 평소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버린 아이가 원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선생님께 무슨 설명을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이렇게 전화를 걸어서 아이가 너무 속상해한다고 어필하고 있는 걸까.


선생님은 기껏해야 20대 후반이고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신 것 같은 순한 인상에 굉장히 예의 바르고 조용한 성격을 지닌 분이다. 항상 나에게 90도 인사를 했고, 아이의 실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과장을 더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아이 또한 선생님을 좋아했고 계속 이 분께 배우고 싶다고 했다.


어찌 보면, 아이의 불합격은 선생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지 모른다.

내 아이가 이런 시험 경험이 처음이라, 너무 긴장하고 떨려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실력이 그 시험 수준에 못 미쳐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방학 두 달간 매주 아침 9시까지 늦잠도 못 자고 아이를 깨워서 꽤 먼 거리를 라이딩해서 데려다주었던 내 노력과 희생, 아이의 순수한 노력, 그리고 거기에 들어간 비용까지 생각해 보니 억울함이 북받쳐 올랐다. 선생님이 먼저 전화해서 아이의 시험 결과에 대해, 뭐가 부족해서 그랬는지 이번 시험 문제 유형이 어떠했는지 설명해 주는 게 아니라면 내가 먼저 전화를 한건 내가 실수한 것 같다.


밉상 학부모가 된 것 같아서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속상한 마음을 좀만 더 억누르고 참을걸.


이런 종류의 시험을 아이가 치러보도록 한 것이 처음이라 나조차도 서툴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학구열에 불타는 엄마들처럼 아이에게 이런저런 시험을 꼼꼼히 준비해서 치르게 하는 엄마는 못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워낙 아이가 뛰어나서 여러 경시대회에 나가서 훌륭한 실력을 여과 없이 발휘하고 상까지 실패의 경험 없이 수상의 영광까지 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만에 하나 시험에서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면 아이가 받는 상처만큼 나도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아이가 실패하고 우는 모습을 보니 말할 수 없이 속상하고,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는지 계속 자책하게 되다 보니 그날 하루종일 우울했다.


아이는 기억력이 오래가지 않아서인지 몇 시간 후에는 금방 잊은 듯했는데, 생각보다 내가 더 힘들어했다. 남편은 그런 나를 계속 달래주었다. 이렇게 실패 경험도 해보면서 아이가 성장하는 것 아니냐며 항상 성공할 수만은 없다고, 교과서에서나 나올법한 말을 나에게 읊어댔지만 별로 위로도 되지도 않고 크게 와닿지도 않았다.


초등학교는 학교에서 보는 정기 시험도 없는데 괜히 내 욕심에 이것저것 준비시켜서 공교육 밖에 즐비한 여러 재단과 사교육에서 준비해 놓은 실력을 가리는 시험을 치르게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굳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그따위 시험들 안 치르면 그만이다. 이제 겨우 초등 저학년인 아이는 그저 주어진 일들만 잘 해내면서 행복하게 일상을 지낼 수도 있다. 나중에 중, 고등학생이 되어 입시를 치르고 취업을 준비하게 되면 치르고 싶지 않아도 치러야 하는 게 수많은 평가와 시험에 놓이게 될 텐데 너무 일찍 그 라운드 위에 세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부모들은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어떠한 종류의 시험이나 대회에 출전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좋아하는 게 있으면 그냥 계속 경험해 보도록 하는 게 낫지 굳이 레벨에 맞는 시험을 보게 해서 현 수준을 파악해 보는 일 따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니, 내가 그걸 감당할만한 멘탈이 되지 못해서, 아이의 시험결과를 마치 나 자신의 결과인 것 마냥 받아들이고 마는 못난 엄마라서 당분간은 회피하고 싶다는게 더 맞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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