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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Oct 25. 2023

단원평가 점수가 엄마의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

부끄러운 고백

초2가 되고 나서 1학년 때와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 중 하나를 꼽는다면 바로 단원평가다. 국어, 수학 두 개 과목 각 단원이 끝날 때마다 평가를 치른다. 단원평가 당 15-20개 정도의 문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엄청 어려운 수준은 아니고  그 단원에서 알고 넘어가야 할 주요 내용들을 간단히 짚어주는 문항들이 나온다. 우리나라 현 공교육의 특성을 반영하듯 객관식이 문형이 주를 이루고 주관식도 서너 개씩 출제된다.


이게 공식적인 평가는 아니라서 각 반마다 치르는 시기는 다르다. 문제유형도 반마다 상이한지, 똑같은지 모르겠다. 아마 교과 지도서나 참고서에 단원평가 양식이 주어질 것 같긴 한데, 선생님마다 조금 바꿀 수도 있고 그대로 출제할 수도 있으리라고 추측된다. 작년 초1 때는 정기적으로 받아쓰기만 치렀던 것에 반해 상당히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단원평가를 치르고 나면 점수가 아주 크게 빨간색으로 아이의 이름 옆에 표시된다.


약간 경악했던 부분은 다른 어떤 반은 단원평가를 옆 짝꿍과 바꿔서 채점한다는 것이었다. 중고생들도 간혹 쪽지 시험이나 비공식적인 형성평가 정도는 학생들에게 서로 바꿔서 채점을 시키기도 한 적이 있긴 하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친구의 시험지를 보고 채점한다는 것이 꽤나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친구의 점수를 확인하게 된다는 것도 어찌 보면 옆친구를 점수로 평가할 수 있는(?) 단적인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도 잠시 들었다. 우리 반은 담임선생님께서 일일이 채점해서 개별적으로 나눠주시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요즘엔 교과서도 따로 가방에 챙겨 다니지 않고 책상 서랍이나 사물함에 놔두고 다닌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지도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아이들 가방만 굳이 더 무거워지는데 집에 일일이 교과서를 들고 다니는 것도 불필요해 보인다. 국어, 수학 매 단원이 끝나면 어느 날짜에 무슨 과목 단원평가를 본다고 우리 반 알리미에 공지가 올라온다.  그런데 학기 초에는 어차피 교과서를 내가 본 적도 없어서 따로 공부를 시키기도 애매해서 그냥 아무런 대비도 시키지 않고 아이의 본실력? 대로 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센터엄마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따로 <EBS 만점왕> 같은 교과서를 충실히 반영한 교재로 복습을 시키거나 단원평가에 대비시키는 엄마도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 하고 있는 학습지 숙제도 매일 시키고 확인하고 학교 숙제까지 제때에 해가도록 시키는 것만도 힘에 부부 치는 판에 문제집을 또 사서 단원평가 대비까지 시킨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매일 해야 할 학습량이 늘어날수록 아이랑 사이만 나빠질게 더 뻔하다. 공부라는 걸 따로 시키지도 않았던 유치원 시절에는 혼자 놀다가 한글 교재도 풀기도 하고 한자에 푹 빠져서 한자 교재까지 풀어제끼더니, 학교에 들어가니 공부가 가장 싫다고 돌변해 버렸다. 솔직히 내 자식이 이렇게까지 공부를 싫어하고 거부할 줄 몰랐기 때문에 한동안 상당히 당황스럽긴 했다.


1학기에 받아온 아이의 단원평가 점수는 들쑥날쑥했다. 특히 수학보다 내가 정말 신경 쓰이는 과목은 국어였다. 언어발달지연을 겪고부터 가장 신경 써서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바로 모국어, 국어 습득 부분이었다. 센터에서 주 몇 회씩 받는 언어수업으로는 이미 또래보다 일이 년 이상 지연된 모국어 실력을 따라잡는데 턱없이 모라 잘 것 같았다. 아이랑 하는 일상적인 대화로도 사실 언어 실력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엄마가 소리 내어서 책을 읽어주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들은 후부터 참 열심히 읽어주었다.


알고 보니 나처럼 따로 아이가 언어발달 문제를 겪지 않는 엄마들 중에서도 깨인 사람들은 독서에 신경 쓰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아무 문제 없이 정상발달인 애들 엄마도 노력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나는 한참 모자라겠다는 한탄과 불안감으로 힘들었다. 그래도 꾸준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아이가 따라오는 만큼은 읽어주려고 했다.


그래서 아웃풋이 나왔냐고? 아니올시다. 당장 눈에 띄는 아웃풋은 없었다. 흔히 아웃풋이란 외국어인 영어 습득에서 많이 쓰는 용어인데 나는 특별히 모국어에 쓰게 되는 쓰는 조금 웃픈 현실이다. 책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주어도 아이의 표현력이나 유창성이 향상된다는 느낌은 없었다. 가뭄에 콩 나듯 아주 가끔 생각지도 못한 말이 아이 입에서 튀어나올 때면 그 흐뭇함이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남편에게 "어머, 애가 이런 말도 했어. 어디서 들었지?"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했을 정도다. 사실 보통의 아이들의 언어발달과정을 따르자면 너 다섯 살에 겪을만한 일들을 나는 한참 늦게 가까스로 경험하게 된 셈이다. 늦게라도 드문드문 터져 나와주니, 그것에 감사할 줄 아는 겸손함을 덕분에 배웠다.


유튜브에서 꽤 유명한 임작가라는 분이 쓴 <완전학습바이블>이라는 책을 읽고 뒤늦게 교과서를 구입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쿠팡 검색만 하면 따로 교과서 사이트를 뒤지지 않아도 바로 구매할 수 있었다. 임작가는 매일 학교에서 공부한 분량을 그날 교과서를 함께 보면서 복습만 해줘도 "완전학습"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교과서를 대부분 중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교육학자들과 집필진이 만든 교과서는 월드클래스라고 자부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교재라고 했다.


임작가 책에서 제시한 대로 매일 복습은 솔직히 무리고, 우리 스타일에 맞춰서 적용해 보기로 했다. 단원평가 날짜가 공지되면 아이랑 같이 시험 볼 내용을 읽어보았다. 다 짚어주고 싶었지만 아이가 하기 싫어하면 대충 넘어가는 부분도 많았고, 그냥 눈으로 훑기도 했으면, 아이에게 선생님께 들은 대로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따로 내가 가르친 적은 없다. 사실 가르치려고 들면 그 순간부터 질려하기 때문에 시도조차 하기 어렵다.


가끔 추석 명절이나 연휴가 끼었을 적에는 아예 교과서 복습도 없이 시험을 치르게 한 적도 있다. 확실히 아무 복습 없이 치른 날은 평소보다 결과가 좋지 않다. 수학은 국어보다 신경이 덜 가서 그런지 교과서는 사놓고 제대로 보지 않은 적도 많다. 이미 방문학습지에서 반복 연산으로 신물이 난 터라 굳이 수학 공부는 복습이라고 해도 더 시키려고 하지 않는 편이다.


또래 아이들의 엄마들과 대화하다 보면 단원평가에 대한 이야기도 가끔 나온다. 그런데 나만 그런가? 괜히 남의 아이들 점수가 궁금하다. "저 집 아이는 무조건 다 백점이겠지? 쟤는 한 두 개씩 틀리려나?" 이런 생각이 가끔 들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아주 저질스러운 속물인가 싶다. 나만 이런 사소한 점수 따위가 궁금한 건가? 그렇다고 함부로 물어볼 수는 없다. 단원평가 점수를 공유하는 건 금기시되는 분위기다. 아무리 편하고 친한 사이라고 해도 어떤 영역이 좀 약한 것 같다, 정도로 이야기하지 대놓고 점수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또래 여자아이가 글쓰기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았다. 굳이 거창한 대회를 나가지 않더라도 그런 건 금방 눈에 들어온다. 같은 반이다 보면 아무래도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들의 수업활동 작품이나 결과물을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 여자친구가 쓴 글들도 접하게 되는데 상당히 잘 썼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느끼는 건 다 비슷한지 나 말고도 다른 남자아이들 엄마들도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우연히 독서 이야기를 하다가 그 뛰어난 여자아이 엄마에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이가 글로 표현을 잘할 수 있어요? 혹시 비결이라도 있나요?"라며 어떤 엄마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엄마들이 이목이 집중됨을 느꼈다. 다들 한마음으로 그 엄마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집중하는 듯했다. 그 여자아이 엄마는 부끄러운 듯 흐뭇하게 웃으면서도 별달리 해준 건 없다고 했다. 약간 실망스럽긴 했지만 정말 뭘 따로 시킨 게 아닌데 아이가 원래 표현력이 좋을 수도 있는 법이다.


아이도 단원평가 점수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시험지 뒤에 "제발 백점 맞게 해 주세요."라고 쓰인 글을 보았다. 나만큼이나 아이도 백점이 간절한가 보다. 우리 가족만 유난 떠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이가 단원평가를 잘 보고 오면 바로 남편과 양가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알린다. 그러고 아이를 듬뿍 칭찬해 준다. 아무리 기본적인 내용 확인 정도라고 해도 간간이 어려운 수준의 문제도 있는데 이걸 다 맞히다니 하면서 그런 아이가 기특하기도 하고 자랑스럽다. 공부 필요 없다고 건강만 하면 된다던 남편도 아이의 백점 소식에는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잘하고 있다고, 대단하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처음 발달지연 진단을 받고 언어도 느리고 사회성도 부족해서 마음고생이 심할 때는 공부는 무슨 공부냐 그저 또래 평범한 아이들처럼 건강만 했으면 좋겠다고 울면서 기도했다. 차츰 치료를 병행하면서 아이도 조금씩 사람이? 되어가고 학습적인 면도 따라와 주는 편이 되니까 또 마음이 이렇게 간사해진다. 기왕 하는 거 잘했으면 좋겠다, 더 했으면 좋겠다, 백점 맞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자꾸 든다. 이건 지나친 욕심일까? 발달이 느린 자녀를 키우는 엄마는 감히 학습적인 부분에서 욕심을 내면 안 되는 걸까. 따로 사교육이나 영재교육을 시키겠다는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치르는 단원평가 좀 잘했으면 하는 건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아이의 단원평가 점수 결과에 굉장히 휘둘리는 편이다. 100점이라는 점수를 받아오는 날에는 아이를 덜싸안고 기뻐한다. 90점, 95점까지는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그런데 80점대로 받아오는 날에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조용히 시험지를 분석하면서 틀린 문제를 한없이 바라본다. 왜 아이는 이 문제를 틀렸나. 어떤 부분이 어려웠을까. 왜 이렇게 쉬운 문제를 실수로 놓친 걸까. 아냐, 실수도 실력이잖아.


단원평가에 백점을 받아오면 기분이 들뜨면서 나의 육아방식과 철학에 아무 문제가 없음을 증명받은 것 같은 승리감에 사로잡힌다. 그래,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만 하면 돼, 하는 마음이 들고 무한 긍정의 에너지가 솟아 나온다. 아니 사실은 아이의 점수와 함께 내 자존감까지 같이 올라가는 기분이다. 사뭇 궁금하다. 나만 이런 거야?


아이들 잘 키워서 명문대 보낸 대단한 엄마들이 쓴 책을 보면 "초등 자녀의 단원평가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라고 하나같이 조언하는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 휘둘리는가. 예전에 아이 낳기 전에는 원래부터 잘나서 뭐든지 잘하는 엄친아 자식을 낳아 키우는 한없이 쿨한 엄마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꿈을 찾아서 미래에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게 중요하지, 한낱 눈앞에 주어진 단원 평가 따위에 신경 쓰는 근시안적인 부모가 되면 안 된다는 거,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천이 전혀 안된다는 게 문제다. 애초에 나는 그런 큰 마음을 타고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변명을 조금 덧붙이자면, 아이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학습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명문대를 보내고 훌륭한 직업인을 만들기 위해 뛰어난 학습 능력이 필수라는 건 당연한 말씀이지만 굳이 그런 거창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학습은 기왕이면 잘하는 게 좋다. 돈이 넘쳐나서 공교육이 싫다고 외국 유학을 보내거나, 귀족형 사립대안학교에 보낼게 아니라면 내 아이를 포함한 대부분의 평범한 아이들은 12년간 공교육을 받게 된다. 그러면 계속해서 필연적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예체능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직은 국영수를 필두로 한 주요 과목이 평가의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아무래도 학습 능력이 어느 정도 받쳐주는 아이가 성취감이나 자존감 측면에서 훨씬 더 유리함은 부정할 수 없다.


굳이 명문대 진학 같은 대단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운전면허증을 따려고 해도 필기시험을 봐야 한다. 시험에 합격하려면 이해하고 암기하는 기본적인 학습능력이 필요하다. 운전면허증이 아니더라도, 아이가 꼭 공부를 잘해야 할 수 있는 직업 영역이 아닌 자신의 재능이나 특별한 손재주를 가지고 먹고살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게 되더라도 웬만하면 국가 인정이든, 사설 기관 인정이든 관련 자격증이 필요하다. 아무런 자격증 없이 할 수 있는 일들도 있지만 엄청나게 뛰어난 능력이 아니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아이가 훗날 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스스로 먹고살 길을 찾아가야 하는데 사회성만큼이나 필수적인 게 기본적인 학습능력이다.


단원평가는 그런 측면에서 가장 최근에 학교 선생님에게 배운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아이의 이해도를 점검하고 확인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닌가 싶다. 틀린 문제가 있으면 꼭 짚고 넘어갈 수 있게 도와줘야 그다음 진도를 나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수 있다. 이제 초2라서 가야 할 길이 먼데, 벌써부터 학습에 구멍이 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선진교육처럼 평가방식이란 게 구술이나 토론, 혹은 에세이 형식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표현 능력 떨어지는 내 아이 같은 경우는 차라리 우리 공교육식으로 지필식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어설픈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아이가 단원평가를 잘 보고 오면 기분이 좋다. 아니, 행복하다. 어쩌다 이런 일차원적인 데에서 만족감과 기쁨을 얻는 엄마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바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지금 하는 만큼은 시킬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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