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으로 돌아간 만 가지 이유
아이가 아직 어리고 치료를 받는 탓도 있고, 남편 일도 워낙 휴가를 내기 어려운 탓에 우리 가족에게 해외여행이란 꿈꿔보기 힘든 것이 되어버렸다. 해외여행이 유행이자 취미처럼 돼버린 때기도 하고 너도 나도 다 나가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나도 나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사로잡혀 몇 번 여행을 가기는 했다.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로 친정식구들과 몇 번 다녀오게 되었다. 짧고 길지 않은 가까운 나라들로의 여행이라 경제적으로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최고급 숙소를 택하지도 않았고 실속 있는 여행 코스를 갔기 때문에 돈이 엄청 많이 들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이조차도 부럽다고 할 수는 있지만 내 주변 지인과 친구들은 워낙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장기로, 더 먼 나라들을 여행 다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나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쉬웠다.
따지고 보면 나는 여행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도 아닌 것 같은데 주변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휩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내 힘으로 돈을 벌 때에는 여행 계획을 세울 때에도 굉장히 마음이 편했다. 가성비 있는 숙소나 항공편을 알아보는 건 없는 자로서 당연한 자세이긴 했지만 그래도 돈이 크게 궁하지는 않았기에 여유 있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돈을 벌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여행을, 그것도 해외여행을 가려고 하니 왠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일일이 다 돈을 하나하나씩 따지게 되는 것이다. 이걸 선택하면 얼마가 들 텐데, 조금 더 저렴한 숙소로 옮기는 게 낫지는 않을까, 스케줄이 좀 빡빡해지더라도 조금 더 저렴한 교통편을 이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전에 여행 다닐 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아주 사소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일일이 따져가며 돈을 최대한 아껴보려고 발버둥 치는 나를 발견했다. 조금 이상하게 변해버린 나 자신에 나도 모르게 놀라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환전을 할 때에도 얼마를 할지 십만 원을 더 할지 말지에 대해서 혼자 치열하게 고민하는 나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드는 것을 도대체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 모든 변화의 원인은 바로 여행자금이 내 돈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나도 모르게 은근히 남편 눈치를 본다는 데에 있었다. 전 같으면 항공편은 내가 부담하고 나머지 비용을 남편 카드로 해결하는 식으로 나도 어느 정도 부담을 나눠서 감당했다면 이제는 모두 다 남편이 번 돈으로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 나도 모르게 자꾸 작아지게 되고 눈치를 보면서 조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가성비 있는 계획을 짜보려고 머리를 굴리게 되는 것이다.
전 같으면 아무 생각 없이 여행 일정보다 여유 있게 환전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현지 쇼핑은 최대한 자제하기로 다짐하면서 다소 빡빡한 금액으로 환전해 가는 나를 발견했을 때, 참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럴 거면 여행은 왜 가는 건지 싶을 정도였다.
중요한 건 남편은 눈치를 준 적도 없는데 나 혼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나조차도 질려버렸다고나 할까.
결론적으로 여행은 다 무사히 잘 다녀왔고 좋은 추억이 되었지만 준비 과정에서 느꼈던 환멸 같은 감정은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다. 왜 나는 그토록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가성비를 따졌으며 면세점의 유혹에도 엄청난 자제심을 발휘하게 된 건지, 나조차도 궁금했다.
특히 여행이란 가정 경제에 있어서 뜻밖에 들어가는 목돈이라고 볼 수 있는데 따로 목적비용 성격으로 돈이 있었다고 해도 늘 추가 지출이 발생되는 큰 이벤트다. 여행을 하다 보면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좀 더 맛있는 거 사 먹고 저것도 해보고 이것도 경험해 보고, 현지인에게 속는 셈 치고 관광용품도 좀 사보고'하는 마음이 들면서 다소 불필요한 지출을 평소보다 관대하게 허락하곤 한다. 그런데 그런 마음의 여유가 다 사라지고 정해진 테두리 내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며 나를 옥죄면서 최대한 정해진 금액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시종일관 신경을 썼다. 그런 내가 넌더리가 났다.
나 스스로 돈을 번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지 몰랐다. 아이가 신생아에 말도 못 할 정도로 어린 아가였을 때에는 휴직하고 집에 있어도 이렇게까지 눈치는 안 보였던 것 같다. 어찌 됐든 어린 아가라는 24시간 전담마크해야 할 어른이 필요했고 나는 큰소리치며 당당하게 그 역할을 해내야 하던 때였다.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좀 달라진 것 같다. 아이가 느리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 크기도 했고, 센터치료며 사교육이며 이럭저럭 교육을 시키고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려면 무엇보다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게 바로 경제력이다. 가장 한 명의 수입에 의존하고자 하니 비록 적지 않은 벌이라고 해도, 나도 모르게 여행이나 사치품 소비 같은 비용 지출 앞에서 남편 자식보다 나 자신을 가장 먼저 희생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꿈꾸기 시작했다. 박봉이나마 내가 벌어서 모은 돈으로 여행 가는 꿈을. 예전에는 당연한 일상이었던 일이 이제 아이 때문에 일을 못하게 되니 더욱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꿈이 되어버렸다. 내 힘으로 열심히 벌어서 당당하게 아이 데리고 다니면서 한 달 살기도 하고 저가 항공사 대신 대한항공 이코노미석이라도 타보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본인 여가생활이나 취미활동을 포기해 가며 성실히 일하는 남편도 참 고맙고 감사하다. 남편 덕분에 크게 윤택하지는 않아도 남부럽지 않은 일상은 꾸려나갈 수 있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가장만 믿고 모든 방면에서 의존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느린 내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직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수만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남 눈치 안 보고 나가 가고 싶은 여행을 가고 내 스스로의 힘으로 번 돈으로 가고 싶어서이다. 이걸 욕심이라 불러도 좋다. 여행 좀 안 다니고 살면 어떻냐고 볼멘소리 하지 말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욕심을 좀 부려서라도 하고 싶은 건 좀 하면서 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