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우동집 라쿠 (Raku)
고진감래라고, 이 글도 쌉싸름함을 먼저 풀어내고 끝은 최선을 다 해 달달하게 끝내려고 한다. 시간이 꽤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볍게만, 상큼하게만 다룰 수 없는 소재도 있는데 지금 풀려는 이야기보따리는 바로 그런 놈이다. 시간이라는 약을 복용하고도 씁쓸함을 차마 감추지 못함을, 필자의 자격지심과 못남을 미리 용서해주시라. 쌉싸래함의 일일 권장 소비량을 이미 충분히 채워버리신 분은 스킵하셔도 좋고, 뉴욕 연극계의 취직 현실이 궁금한 분은 읽어보셔도 좋다. 그래도 이것만은 읽고 가시라. 뉴욕 맨해튼에서 추운 날이면, 국수와 국물로 행복을 찾는 분이라면 라쿠(Raku)의 우동을 권해본다.
자 그러면 감래하기 전에 고진해보겠다.
엄마께서 내가 대학원 유학을 하고 있던 뉴욕을 방문하신 것은 내가 대학원을 졸업할 때였다. 대학원에서의 공부가 결코 쉽지 않았지만, 엄마도 절대 그 시간을 가볍게 보내시지는 못했다. 그래서 졸업할 때나마 엄마께서 내가 3년간 살고, 공부하고, 사랑하게 된 도시를 방문하실 수 있어서 기뻤다. 한국과 다르게 미국의 대학교 졸업식은 보통 5월에 이뤄진다. 5월의 뉴욕 날씨는 한국의 봄 날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나의 기숙 아파트가 완전히 북향이어서 햇빛이 한 톨도 들어오지 않는 방이었다. 뉴욕의 여름은 서울의 여름과 크게 다르지 않고 덥고 습한데, 한여름에도 나는 기숙사 방 안에서 플리스 재킷을 입고 있어야 했다. 그러니 나보다 연세가 있는 엄마께서는 5월의 내 기숙사 방에서 얼마나 추우셨을. 5월에도 내 기숙사 방에서 오들오들 떠셔야 했다.
전문사 과정을 밟는 유학 시절 내내 취직을 고민했다. 하지만 뉴욕 극장의 예술팀에 미국이나 영어권 국가 출신의 백인도 아니고, 영주권도 없고, 원어민도 아닌 내가 취직하기란 정말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다는 것을 철저하게 배워가고 있었다.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인턴십을 2번 이상 해야 했는데 인턴십을 구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취직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으랴. 교수님들께서 흔쾌히 추천서를 써주시겠노라 하셨지만 교수님들의 추천서로도 넘어서기 어려운 장벽이 있었고, 애초에 극장의 예술팀에는 공석이 잘 나지 않았다. 애초에 뉴욕에 있는 비영리 극장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그 모든 극장이 매해 채용 공고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다른 분야처럼 지원서를 백 군데에 내고 하는 것은 가능한 옵션이 아니었다. 그래도 공석이 보이는 족족 지원서를 냈다.
한 번은 학교와 나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극장에 공석이 났다. 절호의 기회였다. 열심히 지원서를 준비해서 냈고 전화 인터뷰를 통과하고, 대면 면접 단계에 접어들었다. 면접장에 들어가자 인터뷰이는 나 하나, 면접관은 백인 다섯 명이었다. 쭉정이 같은 질문이나 답이 없는 상태로 몇 분이 흘러가다가 문득 백인 여자 면접관 A가 물었다.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고? 너 한국에서 대학교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 한국에도 영문학과가 있어?” 아직도 그 면접관이 질문을 던지며 나에게 지은 무지하면서도 천진난만한, 업무상의 미소가 잊히지 않는다. 옆에 있던 백인 남자 면접관 B는 ‘‘헉!’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알았던 것 같다. 그 질문이 얼마나 비세계시민적인 질문이었는지. 좋게 말해서 우물 안의 개구리, 미국 중심적 사고가 드러나는 말이었고, 엄밀히 따지면 인종차별적인 발언이었다. 질문자는 악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지만, 뉴욕 같은 세계적인 도시에 살고 뉴욕의 최대 비영리 극장 중 하나를 대변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분명 부적절했다. 다양성과 포용력을 표방하는 극장의 가치관에 명백히 반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구직 중으로, 을이 되고 싶은 간절함을 담아서 ‘미국 대학교들에도 동아시아학과 많잖아, 그거랑 비슷한 것 아닐까’라고 그 질문이 가지고 있었던 많은 맥락과 뉘앙스를 전혀 모르는 척, A의 미소를 거울처럼 비추며 나도 순진한 척 웃으며 답했다. 아무리 톤을 부드럽게 했다 한들, 가시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노력했다 한들, 나는 포커페이스가 아니다. 나는 미소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입꼬리가 양쪽 다 안 올라가고 한쪽만 올라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그 답변을 하자 백인 남성 면접관 C와 D의 낯빛이 달라진 것은 나의 망상이었을까. B는 내가 왜 그런 답변을 하는지 이해한다는 듯한 동정의 눈빛을 보내며 잘 티가 나지 않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질문은 다시 통상적인 질문들이었다. 비범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답했다.
면접장을 걸어 나오며 내가 그 자리를 완전히 비우고 나면 면접관 다섯이서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할지 궁금했다. 그들이 사건이라고 인지할지도 모르겠지만, 방금 전 내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그들이 논의를 진행할까? 부끄러워할까, 아니면 내가 발칙하다고 할까? 설마 한국도 아닌데 한 때 유행했던 압박 면접이었던 것인가? 나는 면접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부족한 점이 있었는지, 개선할 점을 제시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들이 어느 점이 부족한지, 어떤 것을 개선해야 하는지 이미 머릿속에 상세 목록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내게 피드백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갑이니까. 곧 합격자 공지가 올라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합격자는 영국인 백인 남자 동기였다. 입학한 첫 학기 수업에서 그가 깊지 않을 생각을 영국식 매너리즘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이야기하자 교수님께서 “John (가명), you can’t British me with your accent (존, 너 영국식 억양 쓴다고 뭉뚱그려 넘어갈 생각하지 마)"라고 하셨던 일화가 떠올랐다. 면접관들은 그의 영국식 억양에 홀라당 넘어간 것일까. 그렇다, 미국인들도 영국식 억양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건 내가 좀 야비했다. 존은 그래도 똑똑한 친구니까. 그 극장에서도 자기 몫을 잘 해낼 거다. 그래도 이렇게 떨어질 줄 알았으면 영미 문화권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의 문화적 식민주의에 대해서, 그 극장의 다양성과 포용력에 대한 피상적 비전에 대해서 설교라도 해주고 나올 걸 했나 하고 후회했다. 학교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서 내 경험에 대해 공론화할까 하는 유혹도 느꼈지만 나는 아직 졸업 작품도, 졸업 논문도, 취직도 해야 할 것이 많았다. 나의 이득을 챙기기보다는 내가 공론화함으로써 다른 동양인, 유색 인종, 외국인이 미국 연극계에서 입을 수 있는 피해를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책임감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자원과 시간이 한정된 미물이다. 내 살 길부터 챙기기로 했고, 연극계에 향한 나의 모종의 부채 의식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계속 구직 활동을 했다. 눈도 낮출 대로 낮췄다. 정규직이 아니면 어떠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극장에서 인턴십 채용 공고가 떴다. 좋아하는 극장이니 그 어떤 포지션이든 상관없다며 지원했는데, 서류 과정에서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면접 인비테이션이 오지 않았을 때는, ‘그래, 석사까지 하고 인턴십이 뭐야, 정규직 찾아보지 뭐!’하고 훌훌 털어냈다. 한창 뉴욕에서 화젯거리가 되고 있었던 뮤지컬 <해밀턴>의 패기가 넘치는 My Shot이나 Yorktown 같은 노래의 “I’m young, scrappy, and hungry / And I’m not throwing away my shot (난 젊고, 단호하고, 목말라. 난 내 기회 놓치지 않을 거야)” “Immigrants, we get the job done! (이민자들, 우리 덕에 이 나라가 굴러가지!)”와 같은 가사를 들으며 다시 한번 투지를 불태웠다. 할 수 있다, 해낸다, 한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사님 한 분과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은사님께서는 본인의 근황을 말씀하시며, 따님이 모 극장의 인턴이 되었다며 자랑스레 일러 주셨다. 내가 면접도 보지 못한 바로 그 극장이었다. 은사님의 따님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십대였다. 은사님께서는 물론 내가 같은 인턴십에 지원했던 것을 모르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자, 이후로 은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고,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이 무엇인지도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은사님은 미국의 정당 중 하나에 매해 거액의 기부금을 내시는 재력가이셨고, 그 극장의 이사회 사람들과도 친분 관계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살뜰히 아끼시는 분답게, 내가 구직 도움을 요청하면 주변의 인맥을 통해 추천이라도 넌지시 해주셨을 분이었다. 다만 내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 못하는 편이라 그럴 일은 없었다. 유학 시절 초기에 몸살을 호되게 앓아 침대 밖을 못 나올 때, 많은 친구들이 수프라도 갖다 준다고 했는데 한사코 거절하고는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우둔했다. 그렇게 도움의 손길이 올 때는 받아도 되었을 텐데. 그리고 조력을 받을 수만 있다면, 혼자 못하는 것을 다 혼자 해내려고 필사적인 힘을 쓸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게 어차피 못 해내는 것보다는 나았을 텐데.
나는 그 극장이 전문 지식이 있는 석사 졸업 예정자보다는 뉴욕 엘리트 계층의 청소년에게 인턴십의 기회를 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로 하염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채용 담당자는 내가 그 극장에 할 수 있는 지적, 예술적 기여보다는 그 학생이 인턴을 함으로써 극장에 생기는 인적 네트워크와 기부금의 가치가 더 크다는 계산을 한 것일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덧셈과 곱셈이, 영향력의 수식이 수긍되어 버렸다. 하루 정도는 자포자기해버렸다. 은사님과 점심에 무얼 먹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배가 다 꺼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푸드 트럭에서 2인분처럼 보이는 분량의 팟타이를 테이크 아웃해와서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유튜브 영상들을 보며 꾸역꾸역 먹었다. 도무지 더는 먹지 못하겠다는 기분이 들어도 끝까지 다 먹었다. 그러고 나니 잠이 몰려왔고, 나는 다음 날 알람도 안 맞추고 잠에 들었다. 그런 밤도 있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한국의 학연, 지연, 혈연 못지않게 미국의 학연, 지연, 혈연도 무서웠다. 물론 이 모든 정황은 인과 관계가 아니라 맥락이다. 하지만 백 번 양보한다고 해도 고등학생이 나보다 공연예술에 대한 지식이 빠삭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 학생보다 두 배, 세 배 더 뛰어난 실력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니,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 연극계에서, 더 크게는 미국 사회에서 이방인으로서의 나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지독한 짝사랑을 하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사랑을 되돌려주지도 않는데 왜 나는 그토록 뉴욕 연극계를 사랑했나.
그럼에도 나는 뉴욕에 단단히 홀려 있었다. 처음엔 뉴욕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합격한 대학원들 중 가장 랭킹이 높은 학교를 가기 위해서 뉴욕행을 했던 것이었다. 그전에 여행으로 가 본 뉴욕의 인상이 좋지 않았어서 뉴욕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좋은 학교로 가려니 어쩔 수 없었다. 첫 이 년간은 뉴욕이 미웠다. 더럽고, 냄새나고, 나를 못 살게 굴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캣콜링을 받았다. 집 밖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때로는 모르는 이가 집 근처까지 나를 따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애로사항에 대처하는 방법을 익히고 나니, 뉴욕의 장점들이 보였다.
저점은 한없이 낮고, 고점은 한없이 높은 곳, 그게 바로 뉴욕이었다. 저 높은 고점에 나도 가서 닿고 싶었다. 그 장점은 나의 눈을 멀게 하고 가슴에 불을 피웠다. 이런 불은 그 어떤 다른 존재에게서도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뉴욕에게 계속 어필했다. 나는 너 아니면 안 돼. 나한텐 너밖에 없어. 그 어떤 연애 감정보다도 강했다. 그런 내게 뉴욕은 항상 채찍만 준 것은 아니고 당근을 준 적도 많았다. 절대 기획되지 못하리라 생각한 나의 번역이 뉴욕에서 벌어진 한 국제 희곡 페스티벌에서 낭독극의 형태로 제작되기도 했었다. 뉴욕은 나를 거세게 내치지 않았다. 언젠가는 네 것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내 마음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하며 나에게 여지를 남겼다. 뉴욕은 시티 파탈이라 하겠다. 어장에 들어오라는 것도, 가두는 것도 아닌데 내가 자꾸 내 발로 어장에 들어가게, 계속 나를 어장에 남아있게 해 줬다. 나는 그 어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쑥과 마늘만 먹으며 동굴에서 백일을 버틴 곰의 후손 아닌가. 간헐적으로만 식사할 수 있고, 먹이는 담근 뿐이라 할 지라도 어장에서 얼마든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할 수 있다, 해낸다, 한다!
우리 학교의 내 전공은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프로그램이었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그중에서 단 한 명만 전공 이름을 그대로 딴 일을 하고 있다. (그 친구의 근성과 뚝심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심지어 같은 프로그램 산하의 연출과 학생 중 하나는 아예 예술계를 훨훨 떠나 암호 화폐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졸업한 지 꽤 지난 지금, 내 동기들 중 과연 몇 명이나 예술계에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이는 마음 아픈 맥락이 있는데, 내 전공 자체가 특정한 정규직으로 취직하기가 매우 어려운 전공이며 트럼프 취임기 때 국가의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이 축소되었고, 팬더믹 기간 동안 미국의 공연계는 빙하 속의 고대 생물체처럼 꽁꽁 얼어 잠들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한국과 마찬가지로 생활 임금을 받기가 힘든 분야이기도 했다. (아! 왜 나는 미국은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가.) 2010년대 중반 기준으로 연 50,000달러 이상 연봉을 받지 않으면서 뉴욕에 사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나와 내 동기들은 연 50,000달러에 한참 못 미치는 시간당 12-13달러 정도의 최저 임금, 즉 연봉을 약 23,000달러가량 받았다. 학부 졸업하고도 예술계에서 일하다가 최저 임금을 받았는데, 전문사를 졸업해도 또 최저 임금이라니. 그나마 포지션이 풀타임 (주 40시간)이면 다행이지, 하프타임 (주 20시간)만 일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면 한 달 임금이 세전 960달러였는데, 끼니 비용은커녕 렌트비를 내기에도 어려운 금액이었다. 2010년 중반에 뉴욕의 렌트는 하우스 셰어를 하여 룸메이트가 둘 이상이 있더라도 700달러는 필요했다. 물론 자기만의 방과 사생활을 포기하고 거실의 소파를 렌트한다면 그보다 싸게 월세를 내고 살 수 있는 경우도 보긴 했다. 결국 연극계에 남는 다수는 그런 비인간적인 금전적 보상을 감수하고서라도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독기 (혹은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광기)가 넘쳐나는 사람이거나, 임금을 얼마 받든 지 상관없는 사람들 즉 영어식 표현으로는 trust fund baby (신탁 자금 베이비), 한국어식 표현으로는 금수저들 뿐이었다. 나에게 금수저는 없으니, 내 독기/광기가 시험대에 오를 차례였다.
그래도 나에게는 잠시나마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같이 작업한 적 있는 연출가 친구가 본인이 하고 있던 작은 공연 단체에서의 사무직에서 한국어와 마케팅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를 그만 둘 예정이라고, 원하면 예술 감독에게 나를 추천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정말 일해보고 싶었던 단체는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서 일하면서 다른 자리를 알아보면 되겠다는 셈을 했다. 졸업 공연과 졸업식 사이, 나는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엄마께서 혼자 기숙사 아파트에 계시면 심심하실까 해서 엄마와 함께. 그리고 내가 인터뷰를 보는 사이 엄마께 근처 카페에서 차라도 한 잔 하시면서 기다려 달라고, 인터뷰가 끝나면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인터뷰는 별다른 기억이 남지 않는, 아주 행복하지도, 아주 끔찍하지도 않은 그런 면접 자리였다. 그날의 인터뷰 질문들은 ‘너 마케팅 업무 어떤 것 해봤어?’ ‘소셜 미디어 잘 다루니?,’ ‘네 강점이랑 약점은 뭐야?’ 뭐 이런 상투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니 우리 둘이 짝짜꿍이 너무나 잘 맞는다는 생각도, 이 사람과는 죽어도 일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무난하기 그지없는 인터뷰였다.
하지만 그날 날씨는 우리 엄마에게 무난하지 않았다. 엄마는 실내에서 외투를 입고도 오들오들 떨면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마 북향집에서 묵은 며칠이 엄마의 컨디션을 저하시킨 것 같았다. 내가 워낙 학교 주변에서만 머무니 다운타운의 식당들을 잘 알리가 없었다. 그래서 잽싸게 구글맵을 켜서 주변의 식당을 검색해보았다. 다행히도 근처에 우동집이 하나 있었고, 리뷰도 좋았다. 내가 우리 엄마 호강시켜 드려야 하는데, 아직 그럴 능력이 없으니 이 싸늘한 날에 따뜻한 우동이라도 한 그릇 사드려야지. 우리는 엄마의 외투 자락을 계속 여미며 우동집으로 향했다.
분명 구글맵 상의 주소에 해당하는 곳에 도착했고, 어플에서도 파란 점이 목적지에 도달해있었는데도 식당이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큰길이 아니라 한적하기도 해서 과연 여기에 식당이 있는 게 맞나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와중, 짙은 푸른색에서 미색으로 그러데이션 된 리넨 같은 천이 단정한 베이지빛 나무 문 앞에 달려있었다. 바람에 살랑이던 푸른빛 천에는 일본어로 무엇이라 쓰여있었다. 구글맵에서 Raku라 하니 엄마와 나는 영어 알파벳 네 글자만 찾아보고 있었기에 그곳이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도에 다른 일본어 상호가 보이지 않으니,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지만 이곳이 라쿠이려니 하고 들어갔다. 다행히도 엉뚱한 가게가 아니었다.
식당은 크기가 작았고, 현금만 받기에 식당 구석에 에이티엠이 하나 있었다. 좌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모두가 해변가 바위 위의 따개비처럼 옹기종기 모여 식사해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도 식당에서 위생과 청소에 단단히 신경 쓴 모습이어서, 가게 밖의 이스트 빌리지 거리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하얀색 페인트, 메이플 트리색의 나무로 찬 공간이어서 깨끗하면서도 따뜻함이 느껴졌다. 구글맵에서 아무리 평이 좋다 한들, 서양 국가에 있는 우동집이니 큰 기대가 없었다. 우리가 주문한 우동이 두 그릇이 나왔는데, 눈으로만 보아도 제법 제대로 된 일식 우동이었다. 우동 국물의 김과 함께 우리 안과 주변에 온기가 퍼졌다. 탄수화물을 사랑하는 나는 면을 먼저, 5월의 변덕스러운 뉴욕 날씨에 호되게 당하고 계시던 엄마는 국물을 먼저 맛보셨다. 국수 만들기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나지만, 이건 수타 우동인가 생각하게 되는 쫄깃한 면발이었다. 이로 톡톡 끊어지는 평양냉면의 메밀국수는 메밀의 고소하고 깊은 향으로 사랑한다면, 우동이나 이탈리아 피치 (pici) 파스타, 한국의 수제비 등은 그 쫄깃함 때문에 식단에서 끊어내질 못한다. 라쿠의 우동면은 겉은 보드레, 말랑하고 끊어내려 하면 탄력감이 넘쳤다. 우리 테이블을 지나가는 서버를 멈춰 세우고 면을 식당에서 직접 만드느냐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버는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일본에서 수입해온다고 답해주었다. 식당에서 직접 만든 것이든, 수입해온 것이든 맛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면의 감촉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엄마는 우동 국물을 마시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계셨다. 엄마께 국물 맛이 좋냐고 여쭤볼 필요도 없었다. 나도 한 수저 떠마셔 보니 감칠맛이 돌아 자연스레 엄마와 함께 미소 짓게 되었다. 탄수화물에 염분이 주를 이루는 메뉴이니 현대인의 영양 상태를 생각하면 영양 만점이라고 하기보다는 칼로리 만점이라고 해야 할 한 그릇이지만, 행복지수도 만점을 채워줬다. 소식을 하시는 엄마께서도 면과 국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으시고 우동 그릇이 바닥을 보이게끔 하셨다. 엄마께서 그렇게 잘 드시는 것은 정말 오래간만에 보았다. 가게 밖의 찬 바람, 취직의 고달픔을 잊게 해 준 몇 분간의 식사였다. 우동을 먹는 동안은 여태껏 티를 내진 않았어도, 뉴욕도 나를 진심을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다고 믿어버렸다. 주방장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한 끼의 식사가 아니라 아늑한 포옹이었다. 엄마께서도 우동처럼 따뜻한 말씀을 해주셨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어떻게 되든 엄마는 내가 자랑스럽다고. 엄마는 내가 현명한 선택을 하리라 믿으신다고. 이 세상 그 누가 엄마만큼 나를 믿어주실까. 진짜 다 괜찮아질 것 같았다. 다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식사를 마치고 가게에서 나와서 지하철역까지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인터뷰 결과가 어찌 되든, 우리 둘은 배가 불렀고 마음까지 푸근해졌다. 꽃샘추위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내 졸업 공연이 끝나고 졸업식 직전이 되어서야 나와 엄마, 그리고 내 약혼자랑 같이 한결 더 편안한 숙소로 옮겼다. 그제야 엄마께서는 바들바들 떠는 일 없이 편히 잠드실 수 있었다. 진작에 엄마께서 더 편한 곳에 머무실 수 있게 할 걸, 하고 후회했다.
졸업식 직후, 나는 마지막으로 면접을 본 공연 단체에서 오퍼를 받아 일을 시작했다.
아, 여기서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너무나 완벽했을 텐데. 인생은 픽션이 아니니 픽션과 같은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고진'했어도 무조건적으로 완벽한 ‘감'이 보장되진 않는다. 카카오 85 퍼센트 다크 초콜릿 정도로 생각해주시라.
내가 취직한 단체는 워낙 규모가 작아 나를 풀타임으로 고용할 수 없다고 했다. 하프타임을 일하게 되었다. 또, 내가 원하는 예술팀이 아니라 마케팅 포지션이었다. 그래도 공연 예술 단체였고, 진행되는 공연에 내가 예술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얼마든 환영한다고 했다. 하지만 또 조직원이 나를 포함하여 넷 밖에 되지 않았고 그중 세 명이 디렉터였다. 아티스틱 디렉터 (예술 감독), 행정 디렉터, 기술 디렉터. 그리고 마케팅 어시스턴트인 나. 참으로 독특한 조직 구도였다. 거기에 행정 디렉터는 출산 휴가 중이었고, 사무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내가 혼자였기에 행정 디렉터의 공백을 채우는 것도 나의 몫이 되어버렸다. 나는 일주일에 20시간 동안 최저임금을 받으며, 뉴욕시에서 주는 수천만 원대의 예술 단체 지원금 신청서를 냈다. 방학 때마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아 온 돈이 점점 줄어들었고, 나는 2주마다 받는 급료를 간절히 기다렸다.
내게 위대한 유산이나, 신탁 자금, 금수저가 없다는 것은 애초에 알고 있었고, 내게 지독한 독기가 없다는 것은 뉴욕에서의 마지막 여름에 깨달았다. 뉴욕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 뉴욕에 오래 살면 사람이 인상이 험하게 변한다, 핵폭탄이 터져도 살아남을 바퀴벌레 근성이 생긴다고 했다. 나는 호랑이 띠의 부모님으로부터 뱀띠 해에 태어났다. 별자리로 보아도 독하디 독한 전갈이다. 하지만 나는 참으로 무독했다. 뱀과 전갈의 기운을 받아보려 안간힘을 썼는데, 어째 그 기운이 솟아나지 않았다. 이러니 내가 사주팔자 이런 걸 믿지 못하는 것이다. 예술에 죽고 못 사는 예술인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예술인이기 전에 인간이다. 인간다운 삶 없이는 예술을 만들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일하던 공연 단체에 사의를 표하고, 뉴욕과 작별을 준비했다.
언제고 뉴욕으로부터 절반짜리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 때면 엄마와 함께 먹은 라쿠의 우동을 생각했다. 뉴욕에는 맛있는 것들이 늘려 있었다. 육식주의자들의 신전이라는 브루클린의 피터 루거 스테이크하우스 (Peter Luger Steakhouse)의 쇠고기 스테이크는 이미 한국에서도 너무나 유명하고, 첼시 마켓에서 파는 선인장 과육이 들어간 타코는 그 어디서도 맛본 적 없는 맛이었으며, 시안 페이머스 푸즈 (Xian Famous Foods)의 매콤한 큐민 양고기 국수 (spicy cumin lamb noodle)은 스트레스라는 녀석이 K.O. 사인을 날릴 수밖에 없게 하는 알싸한 맛의 극치다. 그런데 심신이 죄다 쌀쌀한 날,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사르르 녹도록 해 준 음식은 라쿠의 우동이 유일했다. 당연히 내가 처음으로 라쿠에 방문한 날이 엄마와 함께여서 더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내게 라쿠의 우동은 한 그릇의 위안과 행복이 되었다. 엄마와 라쿠를 발견한 이후, 나는 친구들 여럿에게 그곳의 우동을 소개했고, 친구들 라쿠 예찬을 벌이게 되었다. 뉴욕을 떠난 나와 친구들 모두 뉴욕에 대해 회상할 때면, “아, 라쿠 우동 그거 진짜 맛있었는데. 언제 다시 먹지?” “뉴욕 음식 중에서 제일 그리워. 일본 본토 가서 먹어도 그 맛 안 나는 것 아니야?”하는 말을 내뱉게 되더라.
내 인생은 아직 엔딩으로 가기엔 멀었지만 유학 생활에는 엔딩이 있었다. 완벽한 일이 아니어도 일을 찾았으니 해피 엔딩이었다고 생각해도 될까. 하나 확실한 것은 커리어만 생각하면 절반짜리 해피 엔딩이었을지 몰라도, 라쿠에서의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면 내 뉴욕 생활의 일단락은 만점짜리 해피 엔딩이었다. 엄마랑 또 라쿠의 우동을 먹으러 가고 싶다.
엄마, 우리 꼭 다시 같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