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가 흩어지는 공기 속에

by 서비휘


작년 9월 신축된 5층 상가건물이 공실로 나와 있었다.

그 건물의 주인은 커피 콩과 머신을 판매하는 분이셨다. 좋은 커피맛을 내는 콩과 기계를 고르기 위해 여러 나라 중 이탈리아를 자주 드나들었단다. 임대 나온 건물도 그런 영향을 받았나 보다. 지어진 지 오래된 주변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혼자 멋스러웠다.


카페나 음식점을 찾는 사람들이 자주 둘러보러 왔다. 건물의 입지나 유동인구 등 상권을 봤을 땐

여러모로 좋았다. 말이 쉬워 새로운 사업이지. 온 가족의 생계가 달린 문제라 몇 날 몇 밤을 뒤척였을 거다.

생각해보고 맞춰볼 게 어디 한 두 가지뿐이겠는가.

신축이라 월 임차료가 비싸니 다들 거기서 멈칫해 버렸다.


공실 된 지 8개월 째인 어느 날, 무한리필 소고기 체인점을 하고 싶은 30대 중반 젊은 청년이 찾아왔다.

다른 곳에서 매장을 하고 있는데, 하나 더 늘리고 싶다는 것이다.

보자마자 맘에 들어했다. 체인점을 하려면 면적이나 간판 크기 등 개인이 사업장을 내는 것보다 더 많은 조건이 요구되었다.

체인점이 원하는 조건에 정해진 규격이 부합되어야 했다. 하나라도 맞지 않을 땐 일단 계약이 체결될 수 없는 거다.

여러 날을 왔다 갔다 하며 체인점이 요구하는 조건과 맞춰보길 수도 없이 했다. 정해진 간판 크기가 안 나와서

본사와 조율도 여러 번 하는 듯했다.


한 달여 넘는 동안, 사무실과 매장을 오가며 자로 재고 체인점의 규격에 조건들이 맞춰 들어갔다.

가스나 수도, 주방, 닥트시설, 소방시설 등 살펴볼 것을 꼼꼼히 챙겼다.

물건이나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나 출구 등 임차기간이 끝났을 때 원상복구는 어디까지 할지도

미리 정해야 했다. 공들인 시간이 무르익을 즈음, 계약서를 쓰기 위해 테이블에 모여 앉을 날이 정해졌다.


계약서 쓰기로 한 날은 더 반짝이게 사무실 아침 청소도 끝냈다.

약속 시간이 되자, 임대인도 오고 아내 명의라 젊은 청년은 대리인 신분으로 사인이 이루어졌다.

공들인 만큼 쉽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이틀 후 계약했던 그 젊은 청년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이내 떨떠름한 표정의 장모님도 따라 들어섰다. 끝인가 했다. 땅딸한 키에 눈, 코, 입뿐만 아니라 얼굴 근육이 씰룩거리는 처남까지 들어서자, 작은 사무실이 시장통처럼 시끌해졌다.

아내 명의로 쓴 계약이 대출이 안되더란다.

계약 날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명의를 바꾸자고 한다. 아내에서 장모님으로 바꿔주시면 좋겠다고

임대인께 부탁을 했더란다.

그런 전화를 받은 임대인 사방팔방으로 알아봤을 터.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게다.

어렵게 바꿔주기로 결정했으니 이 자리에 나타나셨겠지.


자기 엄마 명의를 쓴다는 게 처남은 맘에 들지 않은 거다. 삐딱선은 오기 전부터 타고 있었다.

누나와 매형이 다시 일어서 보겠다고 도움을 요청했단다.

해줄 수 없다고 하면 원수질 거 같고, 엄마 명의를 빌려주자니 전에 말아먹었던 일이 미덥잖은 것이다.


따라오신 처남 분이 씩씩거렸다. 성질이 나는 걸 참기 힘든 게 느껴졌다.

속으로 씩씩거렸던 맘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 직전, 알 수 없는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눈빛이 모든 걸 뒤엎어버릴 것 같았다.

'매달 월차임이나 제대로 낼까? 혹시 장사라도 안 되는 날엔 이 처남이 나타나 행패나 부리지 않을까?'

의자에 앉으면 조금 나았겠는데, 앉지도 않고 서성거리며 참견을 하고 있으니 임대인이 한 마디 했다.

"거 좀 앉습니다. 서서 따지듯 말하는데 상당히 기분이 나빠요!"


때맞춰 길가던 아이의 부푼 풍선이 빵~터짐과 동시에 사무실 안도 터져버렸다.

손가락질하며 말했다는 게 이유였다.

임대인도 가만있지 않았다. 벌떡 일어서며 이 계약을 할 수 없다는 거다.

젊은 청년이나 아내 이름까진 하겠는데, 어머니 명의론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거다.


처남은 큰 호랑이 포효하듯 소리를 질렀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젊은 청년과 장모님은 어쩔 줄 몰라하고 임대인과 처남이 한 판 붙을 판이었다.

손가락질을 한 게 아니다 맞다로 실랑이가 끝이 없었다. 서로 오해를 한 거 같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처남이 내 책상에 놓인 계약서를 낚아채듯 채 가더니 순식간에 쫙 쫙 쫙 찢는 거에 더해져

길바닥에 확~~ 뿌려버렸다.


누가 볼세라 손으로 얼른 주섬주섬 쓸어 모았다. 머릿속은 이미 하얘졌다.

쓸어 담고 있는 손을 제외한 모든 건 일시 정지된 듯했다.

더 이상 서로의 인간관계는 없다는 듯 각자 들고 왔던 사업용 지갑을 챙겨 들고 돌아가 버렸다.


걷고 있는데, 용기ㆍ패기ㆍ 근자감 그 딴 게 있었나 싶다.

맘은 크기를 알 수 없을 만큼 쪼그라져 버렸다.


생각이 많아진 다음 날 아침, 순한 아기 호랑이 같은 얼굴로 쭈뼛거리며 처남이 찾아왔다.

어제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 싶었다.

밤새 생각해봐도 자기가 욱하는 성질을 못 참고 잘못했단다.

누나를 생각하니 오지 않을 수 없었다며 어떻게든 다시 연결을 시켜달라는 거다.


계약서를 찢은 걸 생각하면 등짝이라도 두들겨 패줘도 시원찮았겠다.

잘못했고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란다.

아직 화가 사그라들지 않았을 임대인께 전화를 드렸다.

단호했다. 하루로 한 달로 끝날 거 같지 않았단다.

매 달 쌈박질할 에너지가 없으시단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며 돌아서는 처남이 앞으로 걸어나길 길을 맘 속으로 빌었다.

세상 살다 보면 성질나고 못마땅한 일 앞으로도 많을 텐데...

'앞 뒤 안 가리고 소리 지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찢고 마구 던지고 싶을 때

한 번만 더 생각해보라고! 몸이 앞서 말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