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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씨 Mar 08. 2023

탈사회복지를 꿈꾸는 사회복지사

사회복지사의 인권 유린


 언제부턴가 ‘탈사회복지’를 꿈꾸게 되었다. 탈사회복지는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업계를 떠나 다른 직업을 찾는다는 뜻이다. 사회복지사를 위한 어느 온라인 커뮤니티 카페에 들어가 보니 게시판엔 ‘탈사회복지’라는 카테고리가 있었다. 이 카테고리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나 역시 한 번쯤은 ‘탈사회복지’를 꿈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5년 차 경력에 접어들 때다. 스스로 일에서 동기를 찾지 못해 무기력했던 것도 있겠지만, 특유의 바뀌지 않을 조직의 분위기와 정체로 더는 이 업계에 발전이 없을 거라 느꼈다. 이 업계의 승진은 나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자리에 물러나면 채워지는 식이니, 개인이 전문가로서 갈고닦는 노력을 얼마나 인정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 전문가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이 참 아이러니하고 외로운 길처럼 들린다. 일단 나보다 직급이 높은 대리님, 과장님, 부장님만 보더라도 그들의 경험에서 배울 것은 있겠다만, 역시나 오랫동안 체화된 무력감이 엿보였다. 



"이런 말하면 꼰대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 때는 하라면 그냥 했어." 



회의시간에 부장님께서 모두에게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 2022년도에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야. 그 말에 누구 하나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활기차게 일하고 싶지만 자꾸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있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무력감이 번진다.



이러한 여건 속에도 맘 맞춰가며 일할 수 있게 힘들 때마다 다독여주신 선임 사회복지사가 있었다. 그분의 현장경험을 들어보면 내가 보고 겪은 일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부당함과 사회복지사의 인권유린은 일상의 일부처럼 가까이 느껴졌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 업계에 희망을 찾기란 힘들어, “사회복지판에 더는 못 있겠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 역시 이 업계를 떠나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국 퇴사를 했고 업계를 떠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분노의 감정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왜 그랬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일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이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동료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억울한 사람이 되는 편이 아닌, 나의 분노를 건설적으로 사용해 작은 목소리라도 내야 했다.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것들 그리고 또 다른 사회복지사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언급한다면, 신입 사회복지사에게는 힘이 빠질 이야기일 수도 있고, 경력 사회복지사에겐 익숙하다 못해 무뎌진 이야기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겪은 인권 유린의 이야기를 개인이 묻어 두어야 할 단순한 부정적 감정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방관, 회피, 가스라이팅, 조용한 퇴사라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묵인되었고 개인이 감당할 감정처리 방식으로 문제가 쉽게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사회복지사 개인의 몸과 마음은 병들어가고 있었다. 우리에게 번아웃은 일상이 되었고 우울증, 공황장애, 그 밖에 신체 증상과 질병으로 약물처방, 치료를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반면, 계속 yes맨, 좋은 사람이 편한 누군가도 있겠다. “바뀌지 않아.” “그냥 월급쟁이 할래..” “그냥 조용히 살래..”라고 말하는 이들. 나도 한때 이런 마음으로 버티는 삶을 살았다. 아마 사회복지사뿐만 아니라 다수의 직업인이 이런 마인드로 내 몫의 하루를 버텨내는데 급급한 삶을 사는지도 모르겠다. 때로 '눈감고 귀 막고 사는 게 약이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우리가 수없이 보아온 악습과 부당함 같은 것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으며, 좀처럼 바뀔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나는 그들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사람마다 상황과 처지가 다르니, 어느 편에 설지 편 가름하는 것이 아닌, 다만 조금은 용기를 내어 제안하고 싶다. 나와 동료가 겪거나 누군가 겪게 될 모욕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 타당성과 논리를 부여하여 이 업계에 새로운 의례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떤 불쾌함, 부당함 등의 느낌이 옳다는 것을 계속해서 우리의 언어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디어에 나오는 간호사의 태움, 교사의 인권유린, 폭력에 무방비한 경찰이 우리 안의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우리. 나아가 다른 직업인의 이야기는 제대로 언급되지 못한 채 묵인되어 왔다. 그저 “좋은 일” “선함”이라는 그늘에 숨겨져 우리 안에 일상처럼 일어나는 인권유린이 가려져왔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것 하나 사소하거나 작은 것이 아님을 알려둔다. 타인의 존엄성을 위해 일하는 사회복지의 현장에선 정작 우리의 인권과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관리자로부터 “너” “너는”라는 호칭으로 아무렇지 않게 불렸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말이었겠지만 그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이 자꾸 따끔거리는 듯했다. 



그는 근무태만이었다. 출근, 퇴근이 정확히 지켜지지 않았다. 10분, 20분도 아닌, 몇 시간 단위로 출퇴근 시간이 자유롭고 근무시간이 지켜지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일이 좀 수월하게 끝나, 할 일을 마치고 정시 보다 15분 빨리 퇴근했다. 그다음 날 cctv로 나의 퇴근 시간을 확인한 관리자가 “너네는 그럴 짬이 안되고 나는 그 정도 짬이 되니 출퇴근에 자유롭다.”라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논리가 없는 말에 당황스러웠다. 그런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상황파악이 안 되니?”라는 말을 들었다. 



어떤 날은 외부기관에 관리자와 함께 방문했는데, 관리자는 차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쏟아냈다. 이유인즉슨, 외부기관 방문할 때 본인보다 앞서서 걸어야지, 왜 뒤따라오냐는 말이었다. 무엇이 문제가 되는 행동인지 한참을 생각했지만 납득이 안 갔다. 그냥 의전이라고 말하지 왜 그렇게 돌려서 말했을까.



그밖에 야근을 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로 자리 잡아, 정시에 퇴근한 직원을 대놓고 면박을 주었던 것. 주말에 업무용 채팅방에 연락이 오는 것뿐 아니라 늦은 자정시간에 업무연락을 하는 것. 직급이 높다는 이유로 고성을 지르고 조직의 다른 팀원에게도 공포 분위기를 조장한 것. 이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으나, 사과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허술한 조치결과는 곁에서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와 무력감을 느끼게 하였다. 또 다르게는 법인 행사에 동원되거나 후원 행사를 위한 티켓을 강매한 것. 돌봄 교사 월급의 일부를 후원하도록 하는 것 등.     








 내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를 사소한 것이나 흘러갈 감정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이처럼 존엄성이 박탈되는 경험을 누군가도 계속해서 겪는다면, 더 이상 묵인되지 않고 자주 회자되고 발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의 이야기가 수면 위에 떠오르고 좀 더 발전적인 새로운 의례를 만들어갈 수 있다. 의례는 바뀌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복지사 개인의 존엄함을 넘어 복지 서비스를 이용하는 대상자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사회복지사 개인이 건강하지 못한 조직 안에 머무른다면, 복지 서비스의 질도 저하되기 마련이다.     








 다시 앞선 이야기로 돌아와... 한때 이 길을 가고자 했던 유능한 사회복지사들이 탈사회복지를 꿈꾸고 있다. 이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되는 것은 이렇듯 문제가 조직 안에 있을 경우다. 나 같이 사회복지 일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경력이 쌓이면서 이 분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발전적인 생각을 키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조직 분위기는 그들을 인정해 주거나 전문가의 영역으로 확장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관료주의적이고 정체된 조직에서 얼마큼 버틸 수 있냐에 따라 누군가는 남아있고 누군가는 떠나겠다. 



젊고 능력 있는 인재들이 사회복지현장을 떠나는 소식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자격기준을 넓혀 더 많은 사회복지사를 양성해 인력 충원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사회복지에 가장 시급한 것은 어쩌면 기존의 전문인력이 존엄한 환경에서 건강하고 발전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일 일 것이다. 우린 먼 곳을 바라보며 정작 코앞의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끝으로 지금껏 용기 내 언급한 나의 이야기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가 앞으로도 개인적인 일 또는 흘러가는 감정으로 치부되지 않길 바라며, 도피를 위한 꿈이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꿈이 되길 희망해 본다. 우리에겐 인내와 수용뿐 아니라 용감함도 숨겨져 있을 거라고 먼저 용기 내 건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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