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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씨 Jan 11. 2023

조용하지 '않은' 퇴사

다음 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첫 이직 후 나의 일터는 말 그대로 우당탕탕 이었다. 



나는 자립준비청년을 지원하는 기관에서 짧게 일한 적 있다. 자립준비청년이라는 명칭이 아직 익숙지 않은 까닭은 이 명칭이 새롭게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도 사실이고, 청년의 빈곤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시점에서 공감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시각이 만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와중, 계속해서 일부 취약 청년들의 문제가 왕왕 발생되고 있다. 








 자립준비청년은 아동양육시설(보육원)이나 공동생활가정(그룹홈), 가정위탁에서 자라 만 18세가 돼 홀로 자립하는 청년을 말한다. 그 당시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이슈로 한창 떠들썩해 정부와 기업, 미디어에선 갖가지 이슈를 만들고 급한 불부터 막는 정책을 내놓기 일쑤였다. 나는 자립준비청년을 대면해 만나는 현장의 실무자로서 그들의 표면적인 문제 이외의 것들까지 서비스 제공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초기 정책 단계의 시범사업은 언제나 좌충우돌하는 듯하다. 자립준비청년을 만나는 일 외에도 상부에서 내방하는 일이 잦아 하루하루가 혼돈 그 자체였다. 








 상관이 올 때마다 내 업무는 중단됐다. 손님이라는 그들을 의전하고 차를 준비하고 사진을 찍는 등. 잡무가 우선이 되었다. 그 밖에 자립준비청년의 실태조사, 정책연구랍시고 외부에서 요청하는 일도 많았다. 당최 그 수많은 비슷한 연구와 조사들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기여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의 불편함과 의문은 계속되었지만, 뾰족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여러모로 중간에 껴서 건네받는 일을 처리하느라 어떠한 목적이나 동기 없이 그저 일을 해치우는 데 급급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나를 포함한 남아 있는 사람은 하나 같이 다 지쳐 보였다. 말을 건네기조차 어려운 분위기였다. 사람이 분명 살아는 있는데, 죽어가는 기운을 느껴본 적 있는가? 그 기운은 어느 순간 나에게도 전염되었다. 



과연 이 상황이 끝나기는 할까? 지친 동료를 보면서 어떻게든 돕고자 했다. 하지만 언제쯤 상황이 나아질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치워도 눈앞이 선명해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참 많은 사람이 떠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아쉬울 게 없는 표정이었고 늘 그랬듯 말을 최대한 아끼고 조용히 퇴사했다. 줄줄이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퇴사를 택한 내밀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들이 뒤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며 짐작할 뿐이었다. 떠나는 이로 인해 마음이 뒤숭숭했던 건 사실이지만, 섣부르게 예단하지 않기로 했다. 기관의 상황이 차츰 나아지길 바랬던 것 같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이직한 곳에서 쉽게 발을 떼고 싶지 않았다. 하나라도 배워 전문가로서 역량을 키우고 싶었다.     



'다 겪어보면 알겠지...'      



매 순간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썼지만 6개월 시점부터는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결국, 나는 퇴사하기로 마음먹고 사직서 양식을 열었다. 사직서를 어떻게 작성할지 참고하기 위해 떠난 이들의 사직서 파일을 열어 봤다. 



'일신상의 이유로~'라고 시작된 문장이었다. 



사직서에는 표면상 개인 사정이라 했지만, 그들이 기관에 환멸을 느끼고 떠났다는 것을 잘 안다. 마지막까지 제 할 말 못 하고 떠난다는 건 나로서 뭔가 억울했다. 물론 할 말을 한다고 나에게 득이 될 건 없지만 내가 보고 느낀 불편함을 더 이상 묵인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내 역할에 충실했다고 생각하기에 할 말은 하기로 했다.



작성한 사직서는 오로지 내가 퇴사를 결심한 사유임을 분명히 하였고 얼굴 보고 이야기하다가는 혹여나 감정이 격해지거나 상할 수도 있으니 편지 형식의 글로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핵심 내용은 이러했다. 퇴사를 결심한 첫 번째 사유는 대상자를 만나는 일보다 보이는 것 중심의 일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 두 번째는 복합적 문제를 가진 대상자의 사례관리를 하다 보면 담당자의 마음 관리가 힘들다는 점, 마지막으로 직원들의 지친 마음이 서로에게 전염되어 특유의 무기력한 조직 분위기가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세 가지 이유를 편지 형식으로 작성해 사직서와 함께 올렸다. 



결코, 조용한 퇴사는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이 말이 묵인된다면 떠난 이후에도 계속 내 마음을 괴롭게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미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조직 내 문제가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표면적인 이유를 들어 퇴사하는 것은 곰곰이 생각해도 아니었다.     








 사직서를 올린 이후 관리자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나에게 불편함을 힘껏 표현하셨고 결론적으로 '어쩔 수 없다. 상처를 스스로 잘 치유하세요.'라는 대답이었다. 관리자는 나의 문제제기에 직면하지 않았고 회피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어 조직 안에서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답을 찾기 위한 나의 의문은 늘 번거로운 일로 치부되었다. 늘 눈앞의 일이 우선이었고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으니, 나 하나쯤 없어도 되겠다 싶었다. 



그렇게 메시지 하나로 나의 퇴사가 결정되는 건가 싶었는데, 퇴사 면담이 진행되었다. 관리자의 첫마디는 내 사직서의 글이 불편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 말이 맞는 말이라고 했다. 인정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인 걸까. 그 복잡한 마음마저 헤아릴 정도로 내 마음의 여유도 없었기에 듣고만 있었다. 뒤이어 지금 상황에서는 모두가 다 바쁘니 어쩔 수 없다는 답으로 돌아왔다. 일말의 기대도 없었기에 그냥 담담했다. 면담이 빨리 끝나 퇴사 날을 정하고 싶었다. 이어 관리자는 나에게 업무상 자신의 어려움을 먼저 이해받길 바랬는지 눈물을 보이며 자신의 위치에서 힘든 것들을 토로했다. 새벽에 전화 연락받아 봤냐. 명절에 나와서 일해봤냐. 분명 퇴사 면담이었는데 나는 관리자의 푸념을 듣고 있었다. 매우 당황스러웠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건강하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를 제기해도 어쩔 수 없다는 답으로 돌아왔기에, 별 수없었다. 내 사직서는 애초에 무언가 바꿔볼 시도는 아니었지만, 정말 달라질 건 없었다. 관리자에게 불편한 마음을 좀 주었을 뿐. 사람도 조직도 구조도 모든 것이 무력하다는 것을 느꼈다.








 퇴사 면담 후 명확해진 건, 어떤 조직이건 관료주의 안에서 개인의 무력함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내가 속한 조직만의 문제일까? 특히, 정부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사회복지 조직은 기존에 해오던 일을 잘 돌아가게만 한다면 특별히 문제 될 일은 없다. 우리가 하는 일을 서류로 잘만 보여주면 외부의 간섭도 없거니와 사기업처럼 손익을 내야 할 압박도 없다. 더군다나 우리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클라이언트 대부분은 정보에 취약하며 우리가 아니고서야 보호할 다른 대상이 부재한 경우가 많다. 이 말들은 어쩌면 우리가 서로 성찰하지 않거나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왔던 일에 매몰되고 안일해질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바꿔야 할 관습은 여전히 남아 있는 채로 말이다.



결국 개인은 바뀌지 않을 무력함에 하나의 소모품처럼 소모되고 버려지기를 반복할 것이다. 무기력에 곪아가거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사회복지사의 소진은 언제까지 개인의 몫으로 둬야 하는지.' '상위에서 요구하는 업무가 대상자의 서비스 질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조직의 소통방식과 시스템은 얼마나 사람을 존중하고 있는지.' 그 밖의 우리가 느끼는 아주 사소하고 본질적인 고민까지 더 이상 개인의 몫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시대는 바뀌고 사람도 바뀐다. 그럼 당연하게 해 오던 일에 의문을 가지는 개인이 생겨날 것이다. 그때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설득이 될까? 남아있는 관습적인 일이 있다면 부족한 부분에 대해 인정할 건 인정하고 충분히 설명해줘야 한다. 그리고 그다음 어떤 비전을 보며 일할 것인지도 동기 부여가 되어야지 덜 지치지게 일하지 않을까? 



하지만 여전히 사회복지 조직 안에서는 뚜렷한 보상이라곤 없으며, 승진은 무기력하게 자리를 지키는 누군가의 퇴사를 기다리는 일이다. 이용자의 피드백 이외에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보상으로 그저 희생하고 버틸 수밖에 없다. 이 안에서 개인의 미래는 막막하다. 그러기에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없이, 기존에 해왔던 것이니 해야 한다는 식의 관습적인 행보는 더 이상 다음 사람에게 통용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지난날 나는 지칠 때마다 서로를 도우며 함께한 사람들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조용히 퇴사했지만 가까운 동료였기에 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떠나는 이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안의 문제를 얼마나 고민했을까. '일신상의 이유로~'라는 말로 첫 줄을 장식한 사직서는 얼마나 많은 말들을 대체한 것일까. 전부 다 알 수는 없지만, 단지 개인 사정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가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그리고 나도 떠난 이들처럼 점차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무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퇴사했다. 비겁하게도 할 말 다 할 것처럼 굴면서 퇴사 날짜를 세며 그 굴레에 하루빨리 빠져나오길 바랬다.



하지만 내가 퇴사를 결심했을 때 내가 겪은 것, 보고 느낀 것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비인권적인 부분에 대해 내부에 알렸을 때, 비밀보장이라곤 없이 어설픈 설문 방식으로 화살이 다시 나로 돌아왔을 때의 수치심과 실망감. 회의라는 명목 아래 한 사람을 까 내리는 모습을 목격한 것. 직급이 높다는 이유로 아랫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퍼붓는 수직적인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관료주의에 의한 부당함과 무력함의 감정들을 참 많이도 참았다고 생각한다. 하나하나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악습, 부당함, 무력함, 정체 이 모든 것들이 떠올라 차마 '일신상의 이유로~'라고 쓰지 않았다.



     





 어느 날 대상자인 자립준비청년이 사회생활에 고민이 있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직장 내 '아이 같은 상사'가 있다고 한다. 상사라는 이유로 갓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불필요한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감정적인 말을 쏟아내서 힘들다고 했다. 그날은 고민 끝에 사직서를 낸 날이라고 털어놨다. 물론 퇴사가 쉬운 결정이 아니기에 면담을 통해 직장 내 고충을 털어놨지만 바뀌지 않아 결국 '조용한 퇴사'를 선택했다고 했다. 



이어 나에게 "선생님은 그동안 퇴사할 때 뭐라고 말했어요?"라고 물었다.     



"개인 사정이 아니라 직장 때문에 힘들어서 그만두는 거면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고 저한테 좋을 건 없잖아요. 어차피 바뀌지 않잖아요."



"저도 몇 번은 그 방법이 편해서 그렇게 말했는데, 계속 같은 불편함을 느끼다 보니 이제는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고요."



"으음...."



청년은 굳이 퇴사 이유를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 청년이 느끼는 것이 옳다고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또 다른 자립준비청년은 직장에서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 같이 일할 때 함부로 대해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상처받았지만 본인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본인이 보육원 출신이라 배경이 다르다는 이유로 여태껏 말 한마디 못 했다고 했다.     



 "그건 직장 내 괴롭힘이에요. 나이가 적고 많던,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던 모두가 존중받으면서 일해야 해요. 믿을 만한 관리자가 있으면 면담 신청해서 말해봐요."라고 위로와 힘을 실어줬지만 실제로 용기를 냈는지는 모르겠다.     








 퇴사의 명확한 이유가 조직 안에 있는데 그걸 개인이 감수하는 조용한 퇴사는 여전히 만연한 분위기다. 누군가가 다시 자리를 채우면 어떻게든 돌아가는 게 조직이지만, 마음 한편에 씁쓸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다. 사회복지사인 우리가 그동안 가장 잘하는 일, 익숙한 일은 연대와 기여다.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우리, 나아가 또 다른 개인을 위해 소리 모아 연대해야 할 때이지 않을까? 


조용한 퇴사라는 말이 누군가에겐 떠나면 그만이니 홀가분한 말일지 몰라도 나는 여전히 마음 한편이 아프다. 퇴사에는 "일신상의 이유로~"가 아닌, 분명한 퇴사 사유가 있기 때문이다. 조용한 퇴사라는 말이 사라지고 당당한 퇴사가 각광받는 시대가 도래하길 바란다. 그럼으로써 조직, 개인도 보다 나아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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