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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씨 Feb 01. 2023

좌절을 배우는 직업

곧이어 희망은 온다.


 처음엔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는 것을 말이다.     






1.

내가 담당했던 자립준비청년 대상자가 성폭행을 당했고 며칠이 지나서야 나에게 그 일을 꺼냈다. 그 세세한 내용은 전해 듣기만 해도 가히 충격이었다. 그녀는 사건 당일 스스로 경찰에 신고해 1차 진술을 했다. 가해자는 그녀가 먼저 유혹했고 본인은 잘못이 없다며 뻔뻔하게 반박했다. 그녀는 신체 증거 채취도 할 수 있었지만 그 상황이 수치스러웠는지, 경찰서를 박차고 나왔다. 결국, 성폭행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고 그녀는 이 중대한 사건을 담당자인 나에게 며칠이 지나서야 말해주었다.



이어 “왜 저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죠?”라고 혼잣말인지, 알고 싶어 묻는 건지 모를 말을 했다. 억울하고 화날 법도 할 텐데, 그 말속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해결할 수 없는 굴레와도 같았고 그것은 트라우마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만 남은 듯했다. 스스로에게 체념 한 모습에 되려 내가 화가 나고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때마다 나의 감정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언니도 친구도 아닌, 전문가로서 상황을 좀 더 냉정하고 뾰족하게 바라보아야 하니 말이다.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분노의 감정을 숨겼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에도 나의 감정은 참다 참다 비집고 나와, 제안이 아닌 설득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었다.



피해자가 진술과 증거에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면 가해자는 충분히 처벌받을 수 있는 사안이라며 그녀에게 지금이라도 경찰서에 다시 가자고 설득 아닌 설득을 했다. 경찰서에 혼자 가는 게 불편하다면 동행해 주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법으로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힘을 실어주었다. 그녀의 진술에 힘을 실어줄 성폭행 전문 상담센터 연계도 제안했다.



“괜찮아요...”



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괜찮다고만 말했다. 체화된 무력감만 느껴졌다.


그다음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어두운 정적만 이어졌다.








 그녀와 함께 한 번은 그 굴레를 깨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결정이 아닌 내 결정일 터이고, 설득을 넘어 내 언어가 어느새 그녀를 압박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엔 그녀와 맺은 관계도 깊거나 길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살아온 환경을 알게 되더라도 나는 결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인생을 살아보지 않고서야. 내가 살아온 환경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친밀함을 떠나 저마다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장벽,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단지 그녀의 인생 어디쯤 변두리에 서성거릴 뿐이고, 먼저 손 내민다 한들 그녀의 의지와 선택 없이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2.

어느 날은 아동보육시설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퇴소한 자립준비청년이 지체장애 3급인데, 남자친구 가족과 함께 살면서 폭행을 당했다고 전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나는 피해 청년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의 정황, 신체적 피해 정도, 조치사항을 파악했다.



남자친구 역시 지체장애 3급이었다. 남자친구는 작은 일로 질투가 발동해 그녀에게 폭행을 가했다. 피해 청년에겐 흉터가 선명히 남았다. 그녀는 경찰에 신고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남자친구 가족들과 한집에 살고 있어 눈치가 보인다는 이유로 신고하지 못했다. 다만 남자친구 어머니께 이 사실을 알렸다고 했다. 이에 돌아온 대답은 “네가 잘 피해야지.”라는 말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폭력에 맞서 어떠한 조치도 받지 못했다.








 그녀와 긴 통화를 나누며 여러 방안을 제시했다. 먼저 자립준비청년을 지원하는 기관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며, 어려운 상황에서 혼자 감당하지 말고 도움을 요청할 것을 안내했다. 이어 남자친구 가족과 분리를 위한 여러 방법을 제안했다. 그녀와 분리될 장소를 두고 여러 말들이 오가고 분리할 장소까지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자친구 가족의 설득이 못 이겨 곧이어 남자친구 가족과 함께 살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성인이지만 장애가 있는 대상자가 위협에 노출되었을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고 그들의 의사결정권 또한 어느 수준까지 존중할 수 있을지 말이다.     



남자친구 가족은 그녀에게 남이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바라본 '가족'이라는 것은 부러움과 동시에 그 안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내 머릿속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그녀의 마음을 추측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마냥 그녀의 결정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한 번의 폭력은 대게 그다음에도 쉽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동보육시설 담당자와 함께 그녀가 사는 곳으로 갔다. 이어 그녀와 남자친구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속도 없이 뭐가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남자친구 어머니는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인지 잘 알고 있기에 과한 친절을 베푸시면서 본인이 그녀에게 얼마나 잘해주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내비치셨다. 피해자는 그녀인데 왜 남자친구 어머니의 노고를 들어야 하는지, 문제의 중심에서 벗어난 대화의 흐름이 불편했다. 단지 그녀가 가족이 없고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남자친구 가족으로부터 신세 지는 입장이 된 것 같았다. 



이어 우리 쪽에서 남자친구의 폭행을 언급했다. 남자친구 어머니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진실이겠지만 막상 직접적으로 언급하니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우리는 여러 기관에서 피해자인 그녀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음을 넌지시 말했다. 우리 말고도 여러 감시자가 또 있다는 것을 언질해 준 것이다. 결국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셨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단속하겠다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은 여기까지다.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쥐어짜지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삶의 주도권은 내가 아닌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지역자원을 활용해 제안하고 문제가 어떻게 흘러갈지 바라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그러나 마음 한편엔 좌절감, 무력감 같은 감정들이 자라났다. 머리로는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타인의 삶에 기대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했다.








 좌절을 배운다는 건 뭘까.


기대를 버리고 좌절에 의연해지는 연습이 필요했다. 그 과정이 쉽진 않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길고 긴 기다림 끝에 희망을 알아채는 날이 종종 오기도 했다.


깊은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희망을 알아차리는 것. 


인생의 큰 좌절을 겪고 있다면 곧이어 희망적인 소식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니까 '희망'이라는 단어가 있기에 우리가 그들 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희망이 올 것을 알고 오늘도 좌절을 배우고 연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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