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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y수 Jan 30. 2024

독립선언 D-2003일

태어난 지 15553일.

결혼한 지 5302일.

부모님에게 독립선언한 지 641일.


숫자가 눈물이다. 

웃음이라 둥둥 떠올라야 하는데 뚝뚝 흘러내릴 수밖에 없나.


나도 측은하고 날 만난 너도 애처롭다. 

온전히 홀로 서본 적이 없는 나는 결혼하며 원래 있던 기둥옆에 다소곳이 너를 기둥으로 세웠다. 

기둥이 두 개가 되었다고 기뻤을 것이다 내 어린 맘에.

똘똘하다 내 머리 쓰다듬었을 것이다 내 어린 손이. 


그렇게 5302일 동안 너는 내 기둥이 되어 주었고

나는 641일 전에 뿌리가 내 뿌리보다 깊은 부모의 기둥을 빼며 너에게 내 지붕을 다 받쳐 달라 했다. 

수도꼭지 혈관처럼 끊어짐이 없던 부모로부터 뒤늦은 독립을 선언하며

네가 나의 모든 산소이며 에너지며 지하수 같은 새로운 부모가 되어달라 부모를 너로 바꾸었다. 


641일 동안 깊이 울고 검게 문드러지고... 슬프게 아물었다. 

엉뚱한 나이 독립에 딸이 통제되지 않음을 괘씸해하신 부모님은 수도꼭지를 잠가버리셨고 

기꺼이 나는 멀쩡한 척한다. 모래언덕에 박혀있으면서 마치 뿌리 아래 물이 퐁퐁 흘러 쓰러질 리 없는 나무처럼. 눈물이 아니라 눈이 부셔 그런 척 눈을 꿈뻑여 서있다. 쓰러지면 안 되어 발가락에 피가 나도록 모래를 움켜쥐며 여유 부려 본다.  


마흔 넘도록 독립 못했던 부모품은 화려한 궁전 감옥이었다. 따뜻했지만 내 것 하나 없었고 

화려했지만 내가 혼자 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용써서 산 모든 세월이 부모덕이 되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럴 참이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의 미래도 그래 보인 순간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궁전을 나와 아이들과 짐을 싸고 도착한 곳은 등 돌리면 서로 얼굴보이는 작디작은 곳. 

그곳에서 아이들과 남편의 에너지로 나는 독립을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이제는 부모님도 편하시리라. 늦은 나이 딸 먹여 살리느라 애를 많이 쓰셨다. 

그런데 나는 보았다. 부모님의 애씀이 기대가 되고, 욕망이 되고, 실망이 되고, 분노가 되어갔음을. 그리고 내 목을 옥죄어 왔음을. 어느 순간부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공황장애 약을 거부했고 버텼다. 내보내 달라 소리쳤지만 그곳은 내 손으로 밖에 못 나오는 곳이었다. 그 비밀의 문은 나만 열고 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독립이 착각이었다. 

부모를 새 부모로 바꾸고 너에게 모든 걸 의지하고 기대어 살고 있었다. 

또 다른 기생이 시작된 것이다. 한쪽만 기대니 공생이 아니리라. 


마음의 고통으로 배운 것이라면 
의존하면 기대할 것이고, 기대하면 실망할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라 이름 바꿔 부를 것이고 억울한 세월과 그 숫자들이 또 흘러내릴 것이다. 

5302일 동안 날 만나 애쓴 너에게 좀 웃어 보일 수 있는 미래로 간절히 가고 싶다. 


나. 

너에게도 독립하려 한다. 

오롯이 혼자 서는 그날을 내 진짜 독립일로 너 모르게 정하려 한다. 

너와 결혼한 지 20년 되는 그날. 내가 너에게도 가끔 기둥이 될 수 있는 온전한 나로 서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너에게 의존하지도 실망하지도 화내지도 않고 살짝 먼 밝은 웃음으로 존재할 것이다.  


D- 2003일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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