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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y수 Feb 06. 2024

네 취향 것 내가 살고 있어.

D-1996

그냥 그거 안 해도 승진에 문제없어.


목이 콱 막힌다. 한마디 하고 싶지만 남편도 나도 진실을 안다고 생각했기에 허공에 움직이는 입을 다물었다. 남편이 직장에서 부가적으로 하면 분명 도움 될 보직을 3번째 놓치는 중이다. 이제 더 이상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걸 이리 잘 포장해 말을 한다. 살짝 겁이 난다. 설마 진실을 모르나.


처음 보직을 놓쳤을 때

남편이 진지하게 고민하며 말했다.

" 아마 그 자리 맡게 되면 1년간은 집에 일찍 못 올 거야. 주말에도 바쁠 것 같고. 근데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모르겠어. 솔직히 하기 싫은데 안 한다고 할까? "


두 번째로 보직을 놓쳤을 때

또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도 설마설마했다.

" 이번에는 분명할 것 같은데. 저번 담당자 보니까 회식도 가야 하고, 주말에도 바쁘고. 건강도 나빠지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런데 할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까 하라고 하겠지. "


세 번째 보직을 놓친 지금

" 다른 사람들이 나는 다음번에도 당연히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번밖에 안 될 사람 A 씨를 뽑은 거라 하더라고. 나는 근데 안 해도 승진에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코로나쯤 명리학을 배웠다. 답 찾기를 좋아하는 나는, 인생의 답을 찾는데 도움을 받고자 명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는 남편을 바라볼 때 그리고 나를 바라봄에 도움이 된다. 우선 화가 덜 난다. 지금 이 상황도 나는 명리학으로 접근하는 것이 낫다.


내 사주를 보면 가장 중요한 자리에 '관'을 뜻하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조선시대쯤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관직에 적합한 사주다. 성공한 직업이 나랏일을 하는 관직밖에 없던 세상이니 얼마나 중요했을까 싶다. 그런데 직업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있는 지금, 조선시대 잘 나갔던 내 팔자는 현재도 잘 나가야 팔자대로일까.


나는 융통성 떨어지고 조직에 충성하는 부류다. 윗사람이 뭘 원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행해서 이쁨 받으려는 노력을 넘치게 해 간다. 조선시대 관직에서 왕에게 충성해야 하는 사주라 그 왕이 지금은 윗사람으로 바뀐 것뿐이다. 남편과 같은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렸을 것이다. 내가 부족해서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 반성하고 자책했으리라. 조직에 내 할 말을 하기보다는 윗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을 쳤을 것이고, 거기에 내 선호도 따위는 들어가지 않는다. 만족도 보다 남의 평가가 중요하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은 이번생에 존재하지 않는다. '관'이라는 글자는 세상의 잣대를 얘기하는데 나는 기준이 너무나 높다 보니, 평생 남들의 취향 살려 만든 기준에 미달되는 인생을 살다 모양새다. 참 남 취향 의존적인 인생이다.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고, 남은 것은 호기심뿐이라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이 모든 과정에서 당신의 부족함은 하나도 없다고 보는 거야?


흠. 나는 지금 사는 게 최선이고,
남들이 나를 나쁘게 평가한들 더 잘할 수도 없어.  
부족한 게 좀 있겠지만, 내 마음 불편하게 하는 생각 안 해.

어쩜 반성도 없이 자기 잘난 맛에 사냐며 대단한 인사이트가 있는 사람 마냥 말해 보고 싶었다. 순간 남편을 남들 취향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리려는 놀부 심보인가 싶어 움찔한다.




남의 마음 불편한 것이, 내 마음 불편한 것보다 우선순위이다.

남들의 평가가, 나를 나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남들이 먹고 싶은 피자가, 내가 먹고 싶은 백반보다 먼저다.    

남들이 어울린다는 파란색 니트가, 내가 좋아하는 회색 티셔츠 보다 중요하다.


도대체 왜?   

아직 목 넘김 시원한 답을 못 찾았다.


44년을 이렇게 살다 보니 나와 남이 구분이 안 간다.  

남편 덕분에 내가 더 극단에 가 있는 것을 느끼는 중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남의 취향으로 더 가득 찬 내 인생에 나 스스로의 향기는 남아 있긴 한 걸까...

독립은 커녕 원래의 나를 찾기에도 까마득한 여정이다.



사진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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