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04 |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았다, 나조차도.
- 전학 갈래?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전체 성적이 나왔다. 1년 사이에 변한 것은 단지 학습실 위치만이 아니었다. 더 크게 변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집에 오면 부모님과 조잘조잘 대화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하거나 친구를 만나러 다녔던 중학교의 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기숙형 학교 특성상 다른 학교에 진학한 중학교 친구들을 쉽게 만날 수 없었고, 시간이 있다고 해도 밤새 과제를 하느라 놀러 나갈 호사를 생각조차 못했다.
'말 수가 줄었다'라는 정도가 아니라 말이 없었다. 집에 오면 주말에 공부할 책으로 가득한 책가방을 내려놓고선 침대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먹고 싶은 음식도 없었고 보고 싶은 영화도 없었다.
무언가를 원하는 감정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색했던 입학 초. 원했던 동아리에 가입하기 위해 지원서를 작성했고, 면접을 보았다. 그러나 어김없이 모두 탈락. 4년 간 동아리와 관련된 대외활동을 했음에도 탈락하는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닌 '내가 지원해서 합격할 가능성이 높은 곳'을 찾아야만 했다. 경쟁률이 높았고 나 또한 그 지원자들 중 한 명이었던 사물놀이, 국제기구 활동 동아리가 아닌 모집 인원이 많은 편이었던 봉사활동 동아리에 가입해야 했다.
청소년 시기에 가족과 떨어져 혼자 기숙사와 같은 공간에 산 사람이라면 대부분 겪어봤을 감정이 있다. 바로 이유모를 '억울함'이다. 특히 이는 누군가가 억지로 시킨 것을 따르는 과정에서 <갑자기 아플 때> 큰 확률로 한 번씩은 겪는다.
나도 그랬는가,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지만, 나는 이전부터 이미 많이 아팠다. (매년 예방주사를 접종함에도) 이미 대략 4번 정도 독감에 걸린 적이 있었으며 '차원이 다른 고통'이라고 손꼽히는 위경련을 일주일에 한 번씩 겪고 있었다. 편두통, 장염, 허리디스크는 기본이었다.
근데 크게 무너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주저앉은 나는 전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1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시점이었다. 집을 떠나 기숙사에 입주한 지 1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어머니로부터 받은 이메일 한 통이 그 시작이었다. 휴대폰 반입이 되지 않는 학교에서는 콜렉트콜 전화와 이메일이 학교 외부와의 연락 수단이었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두세 번 내게 이메일을 남겨주셨다. '밥 잘 먹어라', '주말에 먹고 싶은 음식은 없니' 등의 대화가 대다수였지만.
근데 그날은 달랐다. 취침 직전 점호 전 컴퓨터실에서 본 어머니로부터의 이메일은 나를 완전히 붙들어 놓았다. 대략 내용은 이러했다.
밥 잘 먹고 있지? 날씨 추우니까 주말에 오면 이불 두꺼운 걸로 바꾸자.
오늘은 있잖아. 너 중학교 때 하교할 때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마트 앞 대로변 있지?
거기에 있는 마트 있잖아. 거기서 장을 보고 나오는데, 네가 다녔던 중학교 하교 시간이라 그런지 그 교복 입고 하교하는 아이들이 많더라.
근데 엄마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곧 그 교복 입고 올 것만 같아서 대로변 신호등 앞에서 10분 동안 서 있었다? 진짜 웃기지! 이미 외고 간지 1년이나 지났는데 엄마가 너 엄청 보고 싶은가 보다.
주말에 일찍 가 있을게. 토요일에 보자!
중학생 나는 행복했다. 밤새서 공부했음에도 등수가 전보다 낮아졌어도, 나는 내가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했다. 어머니도, 그리고 나도.
이메일을 보자마자 1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지만 교대 근무를 하셨기에 가끔 중학교 하교 시간에 집에 계셨다. 그렇기에 학교에서 집까지 멈추지도 않고 전력 질주하곤 했다. 어느 시점부터 어머니는 내 하교 시간에 맞추어 하굣길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렸고, 그 장소는 집 앞 대로변 근처에 마트와 빵집이 생기면서 대로변 신호등 앞으로 결정되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장바구니를 대신 들어드리면서 빵집에 들어가 간식으로 먹을 팥빵 하나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좋은 점수를 기대했던 시험을 망친 날이면 다음 날 시험이 남았음에도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닭강정을 먹으며 같이 영화를 보기도 했다. 어머니는 성적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그리고 나의 행복이 중요했을 뿐.
나는 1년간의 삶 속에서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렇게 지내다가 그 학교에서 졸업까지 할 시점이라면 과거의 나는 되찾을 수 없을 거라는 점을 말이다. 어설프고 서투르던 나는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자 세상에서 최악인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미 내 곁에서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할 거라는 직감을 이미 느꼈던 나는 어떤 통증보다 고통스러웠다.
이메일을 확인한 직후, 기숙사에 돌아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교복마저 갈아입지도 못하고 이불속에서 아침까지 울었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여기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나는 전부를 잃었다. 여기까지 고작 1년이 흘렀다.
주말이 되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 앞에서 오열했다. 약하고 멍청한 나는 그 학교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 상황에서도 내게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전학을 가자고 했다. 중학교 친구들이 진학한 고등학교로 가자고 했다. 거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수학과 과학을 더 배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한 달이 지났다. 결론은 외고에 남자는 쪽이었다. 이제는 부모님이 나에게 전학을 권유하셨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복수하고 싶어졌다.
(이번 글은 조금 우울한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글부터는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다음 고등학교 글부터는 이 게시물에 담긴 심정이 기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지요. 다음 고등학교 글부터는 우울한 표현은 최대한 배제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