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부록 - 1 | 사교육 없이 외고에서 살아남은 아이
지금까지 제 자랑으로 가득한 글이었습니다. 어라? 이게 자랑 글이었냐고요? 네 맞지요. 물론 높은 성적을 받는 방법, 대학 합격 비결, 뭐 이런 건 아니었지만요.
저는 제가 한 노력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줄곧 따라온 3년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담은 내용이라 사실 다른 사람들의 고등학교 기록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모든 내용이 끝난 시점에서 여러분들이 좋아할 글을 조금 써볼까 합니다. 제가 3년간 쌓아오면서 성장하면서 기록한 노트를 참고해서 적어보겠습니다. 네 외고에서 사교육 없이 대학 장학금 받고 입학하는 방법을 털어놓습니다.
고등학교 내내 받은 사교육은 인터넷 강의뿐이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기 싫어서 회화와 단어 암기 중심 영어학원, 모르는 문제를 같이 푸는 수학학원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외고에 합격한 후, 단기간 심화 공부를 하겠다며 외고 입학 전까지 수학 과외, 영어 과외를 대략 3개월 정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간 동안 느낀 건 '이 정도면 혼자 해야겠다'라는 생각뿐이었죠. 선생님분들은 죄 없습니다. 그저 제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뿐입니다.
저는 그렇게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많이 배우는 것보다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사교육을 받는 것보다 문제집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부모님은 더 좋아하셨죠. 사교육비는 인터넷 강의 1년 프리패스 비용과 수능 문제집 몇 권이 전부였으니까요. 심지어 똑똑한 언니가 대학 합격 이후 제게 남겨준 문제집이 꽤 많아서 그것으로만 고등학교 3년을 보냈습니다.
사교육은 역시 지름길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의 조언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부재한 저에게는 고등학교 입학 당시 수학 2, 수능 영어 단어 정도를 학습한 게 전부였습니다. 입학하고 나서 조금 친해진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확률과 통계'는 아니더라도 '미적분'은 예습하고 입학하더라고요. 예습이 부족했던 덕분에 저는 조금 험난한 시작을 맞이했습니다.
외국어고등학교답게 영어 공부 분량이 엄청났습니다. 미국 고등학생이 국어 독해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공부하는 교재를 사용할 정도로 말이지요. 제 국어는 영어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실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1학년 당시 영어 교재는 수능 교재 2권, 회화 교재 2권, 8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독해 교재 1권, 영어 원서 3권이었습니다. 2학년 때는 독해 교재와 수능 교재 분량이 급격하게 늘어났고, 수능을 맞이한 3학년이 되어서야 그 독해 교재와 원서를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수능 관련 교재 분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뿐입니다.
그러니 입학 초부터 제가 모든 것을 스스로 공부하기에는 시간이 매우 부족했고, 그게 아마 1학년 당시 영어 성적이 엉망인 이유일 겁니다. 그냥 본문 몇 번 읽으면 외울 수 있는 중학교 수준의 분량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매 영어 시험마다 전체 분량을 두 번 이상 읽은 친구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밤을 새워서 공부해도 시험 당일 아침까지 이해만 된 영어 본문을 읽어보는 게 참 불쾌했습니다. 아마 사교육을 받았다면 그 본문을 조금 외운 상태로 시험을 치를 수 있지 않았을까 예상은 됩니다. 당연하죠. 대한민국은 경쟁의 나라, 사교육의 강국. 그걸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한 번도 학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과목은 바로 수학이었습니다. 저는 객관식보다 주관식에서 성적이 정말 낮은 편이었는데, 수학 풀이과정을 교과과정이 아닌 제가 쓰고 싶은 대로 쓰곤 했거든요. 혼자 문제 풀이를 쓰다 보니 답안지보다 더 빠르고 재미있게 푸는 것에 집착했고 점차 그런 풀이가 늘어났습니다.
그러니 수학 시간이 끝난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을 붙잡고는 "이렇게 풀면 안 되는 건가요?", "왜요?"라며 묻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얘는 높은 성적에는 별 관심 없구나'라는 것을 깨달으신 수학선생님은 질문하는 나의 표정을 빤히 쳐다보시고는 다음 수업 시간에 한번 칠판에 써보라고 하시고는 떠나셨습니다. 수학 예습으로 가득한 교실. 예습 따위는 집어치운 지 오래인 저는 수업시간이 남을 때마다 칠판 가득 공식을 재빠르게 쓰고선 선생님과 공식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가끔 자신이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저에게 빠르게 푸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제안하시기도 했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항상 저보다 빨리 풀이를 정리하시곤 했지만요. 그 문제를 복사한 종이를 들고 매일 저녁시간 텅 빈 교실에 남아 칠판 위에 풀이를 복기하는 것이 가장 즐거웠던 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외국어고등학교에는 열정이 넘치는 학생들을 꾸준하게 이끌어주시는 선생님이 가득하셨다는 것도 공교육만으로 공부하는 제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수학, 과학 좋아하는 아이가 국어와 사회를 배우고 싶다고 외고에 오는 것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던 것도 그 덕분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3년간 외고 한 곳에서만 살아와서 공부 분량 등을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매 수업을 이해할 수 있었을 정도로 충만한 자료와 모든 질문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해주시는 선생님분들이 대다수였다는 건 확실했습니다.
1학년 당시 영어 성적 엉망, 나머지 성적도 그냥저냥인 상황에서 저는 한 신문기사를 발견하고선 그대로 수첩 한쪽에 끼워 넣고 다녔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아마 고등학생을 모집단으로 설정한 통계에서 표준 집단을 학교 유형 구분 없이 수집하신 것 같긴 합니다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일반고등학교 생활을 해보지 않았지만 저는 여전히 성적 경쟁에서는 특목고랑 큰 차이는 없을 거라 생각이 들거든요.
저는 저 10퍼센트가 탐났습니다. 조금 내용을 벗어나자면 제가 육상을 할 때도 누군가를 뒤에서 쫓아갈 때 신기록을 세우곤 했습니다. 성적도 이와 뭐가 다를까요. 1학년 1학기 성적이 평균 이하인 제가 노력 끝에 3년 뒤에는 전국 10퍼센트 이내 학생이 된다는 건 정말 뿌듯할 것만 같았습니다.
이 기사를 잘라서 1학년 플래너와 함께 들고 다녔습니다. 3학년이 되기 전까지 자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때도 이 정도 목표는 성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모양입니다.
결과를 말하자면 저는 2학년 말에 이미 목표를 이뤘습니다. 국어, 수학, 사회, 영어 과목에서 대략 1.7등급을 올렸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폭으로 오른 과목은 국어였고, 꾸준했던 것은 역시 수학이었습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전과목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던 과목은 과학이었습니다. 외고에서 과학은 참 슬프게도 찬밥신세입니다. 제가 물리 문제를 풀 때 다들 미쳤다고 했거든요. 그 상황에서도 "친구가 공부에 미친 모습은 너에게 영향 안 미치니?"라고 말하던 저는 역시 어리석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어리석음, 마음에 듭니다.)
공부 방법은 단순합니다. 전교 1등 공부방법은 아니지만 성적 상승에 도움이 되는 방법은 당연, '복습'입니다. 복습 자체가 중요한 건 단순히 기억력이 허용하는 기간 내에 그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교육 없이 공부하는 저에게, 친구를 제외하면 함께 공부 내용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과목 선생님뿐입니다. 복습을 제대로 하고, 내용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은 공부하는 과정과 함께 '저 학생이 내 수업에 집중하고 있구나'라는 인식까지 줄 수 있다는 것이죠. 많은 학생들이 잊고 있는 것은 선생님도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질문을 하며 선생님과 관계를 친밀히 하는 것. 과목 공부를 하며 외롭지 않다는 것은 제게 위안이 되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그 과목에 애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친해진다고 해서 시험 문제를 알려주다거나 하는, 불법적인 행위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달라지는 건 사실 학생이 그 과목을 공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제게 그 과목은 특히 국어와 영어였습니다. 문과 중심 과목의 성적이 오르니, 전체 성적 또한 크게 올랐습니다.
그리고 보통 1년 정도 각 학년을 맡는 교과목 선생님들은 다른 학년, 같은 교과목 선생님분들과도 자주 대화하시곤 합니다. 네, 학년이 바뀌어도 학생에 대한 인식은 선생님분들 사이에서 유지되곤 했습니다. 이건 기숙형 학교 특성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특정 분야에 뛰어난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이나 혼자 고민하고 치열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 대한민국 공교육은 절대 그것을 허용하지 않지요. 이는 대입 자기소개서 3번 목록에도 잘 드러나있습니다. <학교생활 중에서 배려, 나눔, 협력, 갈등관리 등을 실천한 사례>는 절대 혼자서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협력하는 걸 적으면 돌아오는 건 입학사정관의 이상한 눈초리 정도겠지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혼자서 하되, 최소한의 것들은 처음부터 누군가와 함께해야 합니다. 동아리에 가입해야 하고요, 대회에 나가기 위해서는 팀도 꾸려야 합니다. 그러니 아는 사람도 없고 잘하는 것도 딱히 없는 제가 할 수 있는 건 많은 곳을 두드려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1학년일 당시 같은 학원을 다니는 사람도, 집 주변에서 사는 사람도 없으면서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없었던 저는 항상 <무언가 있는 척>을 해야 했습니다. 무언가 '척'을 할 때는 준비가 철저해야 하지요. 바로 그겁니다.
경쟁률이 높고, 선호도가 높은 활동일수록 더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대부분 선생님분들과 윗 학년 학생들이 주도하는 비교과 특성상 사실상 전문지식보다는 '오 이거 조금 다른데?'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경우가 대부분였습니다. 다들 할 것 같은 것을 피해서 나만의 무언가를 해내는 게 중요했습니다.
예로 3년간 참여했던 수학 발표대회를 들어보겠습니다. 그 당시는 수학이 그다지 재미있거나 잘하는 과목도 아니었습니다만 문과 계열 학교에서 몇 없는 수학 관련 대회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수학 시험 점수 높은 친구들. 1차는 서류, 2차는 발표로 진행되는 대회에서 우선 1차 합격을 하자며 마음을 다잡은 저희 팀은 발표 주제로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를 선택했습니다. 정말 뭐 있는 척을 제대로 했습니다. 물론 팀원 중에 피아노를 잘 치는 친구가 있기는 했지만 저는 저 음악을 단언컨대 들어본 적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뭐 있는 척하려면 우선 제가 이걸 잘 알아야겠지요. 연주곡을 듣고, 논문을 찾아보고 구글링 한 끝에 거의 바흐의 제자의 사촌의 딸 정도는 된 듯했습니다. 1차 서류 전형 결과는 합격. 아쉽게도 결말은 팀원 전부 독감에 걸려 발표조차 못한 채 장려상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요. 2학년 때는 지구과학과 수학을, 3학년 떼는 촛불집회 참가자 수를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방법을 주제로 선정했습니다. 도저히 3년간 기숙사에 처박힌 문과 학생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아는 척 한 셈입니다.
1년 반 동안 최선을 다해 아는 척을 한 덕분에 진짜로 알게 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건 수상 목록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활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소감문이나 독후감 같은 작문 형태의 대회는 단연 주제와 분량이 첫인상을 좌우합니다. 처음에는 양으로 승부 보다가 글을 많이 쓰다 보니 점차 논리성을 갖추는 방법도 깨닫게 되더라고요. 혼자서 성장하던 제가 살아남은 방법은 이게 유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