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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퉁퉁증 Mar 03. 2022

통역 따윈 필요 없는 한일 아줌마들

엄마의 일본 한 달 살기

통역 역할의 저는 이만 빠지겠습니다.




내 귀국을 앞두고 본의 아니게 엄마의 일본 한 달 살기가 시작되었다. 귀국 시점이 정해졌을 무렵 내가 일하던 한국어 교실에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혼자서 교실 일을 떠맡게 되었다. 한국어 교실의 대표(라 말하면 좀 거창하게 느껴지지만)인 S언니의 부재가 두 달가량 이어졌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뭐가 그렇게 힘들었나 싶은데 아무튼 그 당시에는 교실을 혼자 지키는 것이 엄청난 부담과 스트레스로 다가왔었다. 귀국하기 전 엄마와의 여행을 계획했던 터라 일정보다 조금 일찍 엄마에게 SOS를 보냈다.


나는 일을 해야 했기에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하루 종일 엄마가 뭘 하면서 보낼지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엄마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도착한 첫날 저녁은 간단히 외식을 하고 짐을 풀었다. 둘째 날 아침에 눈을 뜨자 엄마가 집에 없었다. 깜짝 놀란 나는 엄마를 기다렸고 얼마 뒤 아무렇지 않게 돌아온 엄마는 근처 공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어쩜 그렇게 공원이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냐며 감탄했고 엄마가 없어서 놀란 나에게 대수롭지 않게 뭘 그렇게 놀라냐고 했다. 때는 5월, 한국보다 동쪽에 있는 도쿄이기에 아침이 빨리 찾아온다. 새벽 네시가 넘으면 환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다섯 시가 되면 밖이 밝아온다. 그 리듬에 엄마의 눈이 빨리 떠진 것이다.


나는 집과 1분 거리에 있는 한국어 교실로 출근을 했고 쉬는 시간인 점심 무렵에 돌아오겠다고 이야기했다. 그 무렵 바빠진 생활에 집에 쌀이 떨어진지도 오래되었고 귀국을 앞두고 있어서 쌀을 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되어 근처에 있는 카레집에 가려고 집에 돌아왔는데 고소한 밥 냄새가 나고 있었다! 분명 우리 집엔 쌀이 없는데?


"요 앞 쌀가게에서 사 왔어. 일본은 아직도 쌀가게가 있네. 엄마가 왔는데 우리 딸 밥은 해 먹여야지. 일본어로 무슨 말을 하는데 내가 못 알아들으니까 대충 눈치껏 주더라."


엄마 말인즉, 내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밥을 하려고 했는데 집에 쌀이 없어 공원 갈 때 봤던 쌀가게에서 쌀을 사 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너무 쓸데없는 걱정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엄마는 슈퍼에 가서 장을 보기 시작했다. 컷팅된 야채들을 보고 혼자 먹고살기 좋겠다고 하기도, 차조기 잎을 깻잎으로 착각해 사온 적도, 식재료가 소포장되어 있어 편리하다는 말도, 장바구니가 참 작다고도 했다. 괜히 마음이 찡해졌던 일도 있었다. 


"엄마, 이 우유 마셔봐. 진짜 맛있어. 나 우유는 이거밖에 안 마셔."


당시에 내가 꽂혀 있던 우유는 빨간 패키지의 우유였는데 편의점에서는 팔지 않고 몇몇 슈퍼에서만 파는 찾기 어려운 우유였다. 어느 날 냉장고를 열어보니 빨간 패키지의 우유가 보였다. 지나가는 말이었는데 그 말을 엄마는 기억했던 것이다. 슈퍼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빨간 패키지 우유가 보여서 사 왔노라 했다.


한 달 동안 엄마는 아침이나 내가 일하는 시간에 동네를 탐험했다. 나도 가보지 않은 동네의 공원들을 찾아내 알려주었다. 그리고 오래된 일본 집들을 보며 옛날 생각이 난다며 좋아했다. 엄마의 고향에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가옥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꼭 그 집들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공원에 유치원 아이들이 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나와있는 모습을 보면 오빠와 내가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이 생각난다고 했다. 엄마는 일본에서 옛날 모습을 많이 떠올리는 것 같았다. 가끔은 멀리 온천을 다녀오거나 틈틈이 시내를 돌아다녔다.


시간은 흘러 엄마의 귀국 날짜가 돌아왔다. 나를 많이 챙겨주신 일본 어머님 3인방이 멀리까지 엄마가 오셨다며 식사를 초대해 주셨다. 괜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권해주신 마음이 너무 고마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서로 어색한 인사 후에 차를 타고 스시집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중간에서 내가 통역 비슷한 걸 하며 일본에 와서 어디를 다녔는지, 뭘 먹었는지 스몰 토크가 시작되었다. 어머님들도 간단한 한국말을 할 줄 알아서 통역 없이도 대충 알아들어 이야기가 점점 깊어졌다.


가족들 이야기, 우리 집 가족들은 다 키가 큰데 나만 작다는 이야기, 엄마가 한 달 동안 일본에 와있으면 아빠 밥은 어떻게 하냐, 아빠가 빨리 오라고 하지 않냐 등등. 대충 알아듣고 질문하고 엄마는 점점 빠른 한국말로, 어머님 한 분은 더듬대는 한국말로, 다른 어머님 한 분은 일본어로 이야기를 했다. 차 안에는 한국어와 일본어와 절반짜리 한국어가 날아들었고 나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었다.


밥을 먹고 옆에 있는 케이크 가게에서 케이크를 골라 가장 연장자인 W상의 집까지 가게 되었다. W상의 집에는 90이 넘은 W상의 어머니가 계셨는데, 아침 눈 뜰 때부터 저녁에 주무실 때까지 한국 드라마를 보시는 한국 드라마 골수팬이셨다. 엄마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할머니는 일본어로 우리 엄마는 한국어로 인사를 드렸다. 반가운 마음은 통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님들께는 나와 S언니 모두 말할 수 없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큰일이 있을 때는 기꺼이 라이드를 자청해주시기도 했고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게도 해주셨다. 엄마는 아직도 가끔 어머님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통역 없이 이야기하는 아줌마들이 위대한 게 아니고 따뜻한 마음이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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