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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김선미 Oct 28. 2022

부모님께 사랑한다 말한 적 있나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말

    말은 때때로 꺼내기가 쉽지만 어렵기도 하다. 특히 내게 사랑한다는 말은 더욱 그렇다. 어렸을 땐 모르겠지만, 크면서 내 기억으로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늘 근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을까? 내가 아는 아빠는 성품도 곧고 시간약속도 잘 지키고 흠잡을 곳 없는 사람이지만, 소소한 애정 표현에는 너무 서툴렀다. 아빠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꼈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나 역시 성인이 되어서도 가족을 향한 애정 표현만큼은 걸음마를 못 뗀 아기 같았다.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은 어릴 때 편지에 쓴 게 아마도 다인 듯하다.

   

    고민만 하며 우물쭈물하는 동안, 아빠의 컨디션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설날 전까지 엄마와 아빠를 순천(우리 집)에 모셔와 함께 지내다가 설 연휴 전날에 함께 인천으로 올라갔다. 연휴가 끝나고 일주일이 더 지난 후에야 아이들을 데리고 순천으로 돌아왔다. 시끌벅적한 손주 셋과 오랫동안 붙어있었으니 행복도 행복이지만, 정신이 없었던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빠와 시간을 보내려는 내 욕심만 마냥 채울 수는 없었다. 부모님의 귀도 쉬게 할 겸 아빠 진료일에 맞춰 며칠 후 다시 친정에 가기로 하고 집에 왔다. 


    그날 밤, 아빠는 처음으로 경련이 일어났다. 겨우 진정이 되었나 싶었는데, 다음 날 오전에 다시 경련이 일어나 119를 불러 응급실로 갔다. 그렇게 아빠는 아무도 면회가 되지 않는 병동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입원 후 하루 동안 아빠는 가족 채팅방에 아무 언급이 없었다. 다음 날, 여느 때처럼 아이들 등원을 시키고 집에 와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전 7시 53분. 아빠에게 메시지가 와있었다.

     


    아빠는 처음으로 내게 사랑한다고 했다.


    처음 듣는 말에 울컥하고, 마지막 인사로 들려 또 울컥하고, 아빠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아 눈물이 나버렸다. 아빠는 이 짧은 한 줄에 얼마나 많은 감정을 담아놨을까. 멀리 떨어져 있어 아빠를 눈으로 볼 수 없던 나로서는 상황이 급박해 보이기만 했다. 그런 건 직접 보고 얘기해야 한다면서 나도 사랑한다고, 이만큼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답장했다. 이내 덜컥 겁이 났다. 아빠가 곧 떠날 것 같았다. 당시 나는 당장이라도 인천에 가야 할 것처럼 불안해했지만 다행히 남편과 통화를 하며 진정이 되었다. 


    벌써 몇 달이 지난 이야긴데 이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슬프다. 어린이날이 지나고 입원한 병동도 이때 입원했던 병동과 같은 곳이다. 면회가 되지 않는 곳이라 아빠와 만날 수 있는 건 핸드폰이 유일한데 지난번처럼 아빠는 입원 후 하루 동안 가족 채팅방에 아무 언급이 없었다. 


    다음 날, 아빠와 연락되지 않는다며 전화를 걸어온 엄마와 통화를 하다가 예약해두었던 미용실에 갔다. 머리를 하면서도 아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머리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기분이 쌔 해서 전화를 받음과 동시에 녹음 버튼을 눌렀다. 잔뜩 힘이 빠진 아빠 목소리가 들려온다.


선미야, 아빠 이제 더 이상 통화 못 해.


기력도 없고, 숨이 차다고 했다. 병실에 혼자 있던 아빠는 간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간신히 내게 전화를 걸었다.



“별일 없지?”

“별일 없어요.”

“알았어.”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 너만 믿는다.”

“그럼 나 믿어야지. 걱정하지 말고.” 



통화를 하며 이제는 쑥스러워할 시간조차 없음을 느꼈다. 지금 안 하면 분명 나중에 후회하겠다 싶어 얼른 입 밖으로 내뱉었다. 밝은 목소리로.



“사랑해요.” 

“아빠, 편안하게 준비하고 있을게.” (아빠는 내 말을 못 들었다.)

“뭔 준비야~”

“하여간에 애들 잘 키워. OO이(남편)에게도 얘기하고.”  


   

엄마도 남동생도 따로 통화를 못 했다며 얘기를 전해달라 했다. 그리고 ‘잘 있거라’한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이 악물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고생했어요.”

“고맙다.”

“잘 살아왔어요.”

“응.”

“너무 고생 많았어요.”

“알았다. 들어가라. 끊을게.”     



    아빠 역시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을 삼키던 아빠가 울고 있는 딸내미가 걱정되었는지 울지 말라 한다. 이내 둘은 눈물을 머금고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아이들이 오면 이따 통화할 수 있냐 묻자 안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통화가 안 되더라도 그리 알고 있으라고. 



“사랑한다.”

“나도 사랑해요.”

“고맙다.”

“나도 고마워요.”     



    아빠와 나는 또다시 울며 아꼈던 말들을 나누었다. 



이 말들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 건지.

이게 뭐라고 입 밖으로 꺼내는 걸

그렇게 어려워했는지. 


    막상 입 밖으로 꺼내 보니 그동안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에만 그친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금방이었다. 생각보다 쑥스럽지 않았다.    

  

    아빠 스스로가 마지막이라고 느낄 때, 딸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한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우리에게 사랑의 표현은 점점 솔직해졌다. 그건 서로가 안심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배려이기도 했다. 아빠의 표현 덕분에 평생 남을뻔했던 마음의 숙제를 했다. 


    훗날 ‘그때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는데….’라며 후회로 사는 대신 아빠에게 ‘사랑한다’ 말했던 따뜻한 기억으로 나의 남은 날들을 채워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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