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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김선미 Oct 29. 2022

아빠에게 마지막이 오고 있다

순천에서 인천까지 5시간, 길고도 짧았던

    남편의 생일은 5월이다. 행사가 많은 가정의 달에 남편 생일까지 있으니 5월은 그야말로 우리 가족에게 가정의 달이다. 남편의 생일날, 병원에 있는 엄마에게 영상통화가 걸려온다. 핸드폰으로 아빠를 비춰주며 엄마가 말했다. 



“사위! 생일인데 맛있는 것 좀 먹었어? 돈 넣어놨으니까 맛있는 것 사 먹어~” 

“장모님, 뭐 이런 것까지 챙겨주세요.”


장인어른이 사위 생일 챙겨주는 게
마지막이라고 챙겨주셨어.

         


    화면 속 아빠는 우리를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이내 아이들과도 통화를 한다. 아이들은 이따 아이스크림케이크를 먹을 거라며 신이 나서 자랑을 했고, 우리 집 분위기 메이커 막내 딸도 할아버지에게 재잘재잘 쉬지 않고 말했다. 여전히 아빠는 화면 속에 보이는 손녀를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아빠는 졸린 사람처럼 눈이 자꾸 감겼다. 영상통화를 하는 10분 동안 나는 아빠를 유심히 보았다. 전화를 끊고 남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나 이번 주말에 인천 가봐야겠어.”

“왜?”

“아빠 컨디션이 영 아니네, 이번 주말에 다녀오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아빠와 영상통화를 자주 하다 보니 화면 속 아빠의 모습을 보면 컨디션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날 아빠의 모습을 보니 아빠와 영상통화를 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주말에는 무조건 아빠를 보러 가야 했다.


    아빠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입원했던 병동은 보호자조차 면회가 안 되었지만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면서 면회는 지정된 보호자 두 명까지 가능했다. 그래서 엄마와 동생만 병원에 갈 수 있었는데,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이 무렵부터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보호자의 자격이 나에게도 주어졌다. 다만 PCR 검사 결과가 음성임을 확인해야 했다.

    

    다음 날,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담당 간호사에게 전화하여 코로나 검사를 언제 해야 하는지 물었다. 주말에 아빠를 보기 위해선 금요일 오전에는 검사를 진행해야 다음 날 오전 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보았다. 내일 오전에 검사하고, 아이들 하원 후 시댁에 아이들을 맡긴 뒤 출발하여 친정에서 자고, 다음날 오전 결과 문자를 받자마자 병원을 가면 되었다.




    통화가 끝나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독서 모임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운전을 하는 중에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의 컨디션이 갑자기 떨어져서 1인실로 옮겨야 할 수도 있단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비상등을 켜고 차가 드문 곳에 정차했다. 담당 간호사, 병동 간호사와 번갈아 통화를 했다. 

     

    어제까지 의식도 양호하고 혈압, 산소 수치도 양호했지만, 밤을 거치고 아침이 되면서 수치들이 전반적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의식도 명료한 의식에서 졸려 하는 의식으로 떨어지는 상황이고, 호흡곤란도 많이 심해져서 약을 조절하고 있는데도 숨이 많이 차고, 120~130정도 유지했던 혈압이 80~90정도로 떨어졌다고 했다. 산소 수치도 유지가 안 되어 산소 마스크로 변경을 해 둔 상태라 했다. 

    

    지금은 다인실에 계시지만 혈압이 떨어지거나 산소 수치가 오르지 않는다면 1인실로 옮길 예정인데 언제 옮길지는 장담할 수 없다 했다. 간호사는 내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가까이 있는 게 나을 것이라 했다. 떨어지는 속도가 있어서 솔직히 내일, 아니면 주말까지 견뎌주실 수 있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전전긍긍하고 있을 고모와 작은아빠의 면회 가능 여부도 물었다. 전화를 끊고 몇 통의 전화를 더 해야 했다. 남편에게 오늘 가야겠다 말하고, 어머님께도 상황을 설명했다. 엄마에게도 간다고 말한 뒤 순천의료원에 가서 PCR 검사를 했다. 

    

    집에 온 뒤 일단 큰 가방부터 꺼냈다. 언젠가 이런 시점이 올 거란 것도, 현재 한시가 급한 것도 알고 있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몽유병 환자처럼 짐을 싸기 시작했다. 평소 인천에 갈 때 쌌던 짐과는 조금 달랐다.  

    

아빠의 장례식을 치를 수도 있겠구나.   


    옷은 검은색 위주로 챙겼다. 짐을 트렁크에 싣고 출발하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컨디션부터 묻고 아빠를 바꿔달라 했다.     



“가고 있어! 좀 기다려줘!”

아빠는 숨이 찼지만 어눌하게 대답했다.

“어.”

“좀 기다려줘! 좀만 기다려줘, 가고 있잖아.”



    아빠는 알 수 없는 한마디를 했다. 엄마는 아빠가 눈을 감았다며 숨이 차서 말을 잘 못 한다고 했다. 혹시 아빠의 목소리를 들을까 싶어 전화할 때 녹음을 했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알 수 없는 한마디는 “빨리와 얼른.”으로 들렸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이때의 통화가 아빠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고속도로 위에서도 전화는 쉴 새 없었다. 작은아빠와 고모에게 상황을 알리고 코로나 검사를 미리 해두시라 했다. 외삼촌에게도 상황을 알렸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 동생이 일하는 병원 내 장례식장에 대해 알아봐 달라 부탁하고, 세 아이 각각의 담임선생님께도 등원에 대해 말씀드려야 했다. 친구는 운전 중 검색을 할 수 없던 나 대신 장례식장과 상조에 대해 알아보고 설명해주었다. 참 고마웠다. 그저 앞만 보고 운전을 하던 나는 눈물을 흘리다가 담담하다가를 반복하며 인천으로 올라갔다.

     

    문득 우리 가족이 만든 노래가 떠올랐다. 2주 전부터 아빠와 음악치료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만들었던 노래가 완성되어 내일 줌(ZOOM)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시간조차 아빠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담당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에게 완성된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다고 부탁드렸다. 담당 간호사는 아빠가 진정 치료 중이라 아빠의 반응을 보는 것보다는 노래를 들려드리는 것에 의미를 두자고 했다. 음악치료 선생님까지 합세하여 인천 도착 30분 전에 아빠에게 완성된 노래를 들려줄 수 있었다. 순천에서 인천까지 오는 5시간은 길고도 짧았다.  




    친정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있었다.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상황이 급하게 진행되는 것 같아 병동 간호사와 몇 차례 더 통화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저녁에라도 면회를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얼굴만이라도 봐야 했다. 아빠가 임종에 가까운 환자였기에 보호복을 입고 5분만 보고 나오기로 약속하고 병원으로 갔다. 호스피스 내 1인실은 1개였고, 다른 분이 먼저 사용하고 계셨기에 아빠는 예비 1인실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빠는 깊은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아빠가 살아 있다는 것은 침대 옆 EKG 모니터(심전도 모니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보호복을 벗을 수 없기에 비닐장갑을 낀 채 아빠의 손을 잡았다. 눈앞에서 보는 아빠의 고요한 모습에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난 아빠를 잠깐 봤을 뿐인데, 어느새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원칙상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라 약속을 지켜야 했다. 기약할 수 없지만 흩뿌려진 지푸라기를 잡으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올게요.
아침까지 기다려 줄 수 있지요?   

 

    한 발이라도 떼면 더 이상 아빠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떼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무거움을 이제야 느꼈다.


< 그동안 왜 아빠 손을 많이 잡지 못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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