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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김선미 Oct 30. 2022

호스피스에서 밤을 지새우며

아빠의 곁에 있는 이들

    코로나 거리두기 완화로 나에게도 보호자의 자격이 주어졌지만, 병원에 있으려면 48시간에 한 번씩 코로나 검사를 해야 했다. 검사 후 24시간이 지난 터라 우리에게 하루의 여유가 있었지만, 주말에는 병원 내 검사실을 운영하지 않아 미리 해두는 게 나았다. 병원에서는 보호자에 대한 검사 비용이 자꾸 바뀌었다. 엄마도 초반에는 상주 보호자 자격으로 본인부담금이 만 원 미만이었다가 어느 날부터 2만 원을 넘기더니 내가 있을 때는 상주 보호자 자격과 상관없이 6만 원이 넘는 비용을 내야 했다. 엄마와 동생, 나까지 3명이니 우린 19만 원이 넘는 검사 비용을 이틀에 한 번씩 부담해야 했다.


    간호사에게 코로나 검사 시간을 묻고 5시까지라고 해서 부랴부랴 원무과에 접수하러 간 시간은 4시 58분. 4시 45분까지가 접수 마감이란다. 엄마와 나는 검사를 하지 못했고, 화장실 간 줄 알았던 남동생은 이미 검사를 하고 왔다. 다행히 보건소는 6시까지 운영을 하고, 상주 보호자에 대한 검사 비용이 무료였다. 엄마는 보건소로 바로 갔고, 음성 유효 기간이 하루 남았던 나는 내일도 운영한다는 엄마의 말에 안도하며 내일 가기로 했다.     




    5시 넘어서 김해 사는 고모 내외가 도착했다. 고모네 역시 음성 결과 문자를 보여준 후 햇살 방에 들어올 수 있었고, 10분의 면회 시간이 주어졌다. 아빠와 7살 차이가 나는 고모는 아빠에게 그저 어린 막냇동생이었다. 병실에 들어온 고모는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막상 눈앞에 있는 아빠를 보니 먹먹함이 몰려오는 듯했다. 고모가 아빠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큰오빠, 고생 많았어.
장남으로 태어나서. 좋은 데 가서 있어.    


    잔뜩 목이 멘 목소리로 갑자기 이렇게 안 좋아질 수 있냐며 아빠와 이틀 전 통화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엄마가 집에서 소불고기를 해왔다고 말하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칭찬받으려고 자랑하는 것 같았단다. 눈을 뜨지 않는 아빠를 향해 애잔하게 웃는 고모의 얼굴에는 벌써 그리움이 들어서 보였다. 고모는 슬픈 모습보다 늘 그랬듯 아빠에게 웃는 모습을 보이려 했다. 고모가 “오빠, 큰오빠!”하고 크게 부르자 아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다 들려, 이놈의 지지배야! 작게 좀 말해.’라고 하는 것 같다는 고모의 말에 같이 보고 있던 우리는 훌쩍이다가 이내 웃었다. 그 순간 햇살 방에 명절날 담소를 나누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드리웠다. 고모는 다시 아빠의 손을 잡고 아기에게 말하듯 말했다.     


“이 세상에서 고생 많았어, 오빠. 많이 그리울 거야. 잘 가서 있어. 응? 오빠 내 소리 들려? 응~ 들려 들려. (우리를 보며) 인상을 이렇게 쓴다. 많이 그리울 거야. 고생 많았다 오빠.” 

    

    소리 없이 숨만 쉬던 아빠가 대답하는 건지 소리 내어 숨을 쉰다. 이어 고모부도 아빠의 오른손을 꼭 잡았다. 내가 서 있던 자리를 고모에게 내어주었다. 고모도 아빠의 왼손을 꼭 잡았다. 고모부가 아빠 손이 꺼덕꺼덕한 것 같다 하니 고모는 손을 이렇게 잡아보라며 양손으로 아빠 손을 감싼다.    

 

“오빠, OO이 아빠 OOO. 응? 오빠. OO이 아빠랑 같이 왔지. 매제 매제.”  

   

    무뚝뚝한 고모부도 아빠 손을 주무르며 아빠를 바라보았다. 손만 잡았을 뿐인데 벌써 약속 한 시간이 되었다.      


    보건소에 간 엄마는 동생과 저녁을 먹기로 하고, 난 고모네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말이 저녁 식사지, 아빠 장례에 관한 얘기를 하러 간 것이다. 고모가 아빠의 장례를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묻는다. 아빠는 화장을 원했다 했고, 이후에 나는 가족공원 수목장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수목장은 한 그루의 나무를 중심으로 여덟 분을 모시는 거였다. 내 말을 들은 고모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보며 말한다.     


“얘, 아빠가 여기서도 많이 치였는데, 거기에서도 치이는 건 너무 속상하지 않니?” 

    

    고모부 형님의 장지 사진을 보여주려던 고모부가 사진을 못 찾자 검색 후 나에게 비슷한 사진이라며 보여준다. 아빠가 원하는 대로 화장을 하고, 유골함을 묻고 비석을 세우는 건 어떻냐 물어본다. 이건 가족들의 의견도 필요하기에 장례식장 얘기로 넘어갔다. 내가 문의했던 두 곳을 비교해 둔 종이를 보여드리며 설명해드렸다. 아빠는 사람들이 오기 편할 거라며 입원했던 병원 내 장례식장을 원했다는 얘기도 함께했다. 고모네는 우리 집으로 안 가고, 병원 근처에 호텔을 잡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전화하라 했다. 

    

    고모네와 헤어진 뒤 병원에 오니 엄마가 와 있었다. 차에서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온 뒤 후다닥 세수와 양치를 하고 엄마와 동생을 보냈다. 병원에는 나와 아빠만 남았다. 침대 옆 간이 의자에 앉았다. 아빠의 핸드폰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왔고, 내 앞에 있는 EKG 모니터와 오른쪽에 있는 아빠를 번갈아 보며 아빠 손을 잡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아빠가 갑자기 기지개하듯 양손을 든다.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오른쪽 다리도 들렸다. 말을 하지 않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힘들어 보이기도 했다. 아빠의 상태를 본 간호사는 진통제를 투여했고, 20~30분이 지나도 계속되면 수면 진정제를 놓는다고 했다. 옆에 내가 있다고 말하며 한 손은 아빠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아빠의 가슴을 토닥였다. 아빠가 팔을 들어 올릴 때는 깜짝 놀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화들짝’이란 표현만큼 빠르진 않았지만, 팔을 올릴 때 힘이 어찌나 센지 오히려 내가 화들짝 놀랬다. 아빠의 행동은 30분간 계속되어 간호사에게 말했고, 11시 5분에 수면 진정제를 놓았다. 몇 분이 지나고, 아빠의 팔은 밤새 올라가지 않았다. 그저 다시 꿈을 꾸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정이 되기 전, 낮에 만났던 친구에게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아빠를 위해 만든 책인 <인연의 인연>을 쓴 뒤에 친한 몇몇 친구들과 나는 아빠를 김인연씨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 친구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고모와 허물없이 지냈던 친구는 고모가 잘 오셨는지 묻는다. 그러면서 초등학교 때 이야기를 한다.     


초딩 때 너희 집 갔는데, 아빠가 양복 입고 출근을 하시는 거야. 그냥 아빠 계신 것만으로도 얼마나 부러웠는지. 아직도 생각나 그게. 힘들겠지만 너무 오래 힘들어하지 말자! 복 받은 년이야. 아빠 사랑받고 살고. 너도 아빠에게 충분히 잘했고, 손주를 셋이나 두었으니... 그래서 아빠가 더 안 아프시고 지내셨을 거야. OOO동 OOO호, 그때의 김인연씨는 무섭지만 부러운 존재였어. 나중엔 안 무서웠지만 하하.   

 

    표현을 어지간히 안 하는 친구가 이렇게 말하니 그저 고마웠다. 친구에게 모니터 화면을 찍어 보내주며 계속 이걸 봐야 할 것 같다 하니 마음이 아프단다. 


 

 몇 분 동안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친구는 ‘김인연씨 같은 아빠가 있는 김선미가 부러웠다.’고 아빠에게 전해주란다. 눈물과 웃음이 공존한 친구와 문자 수다를 마무리하고 다시 아빠를 보았다. 아빠는 여전히 꿈을 꾸는 듯했다.  


    간호사와 요양보호사가 번갈아 들어와 아빠의 상태를 확인한다. 오랫동안 침대 옆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본 요양보호사 여사님이 소파에 편히 있으란다. 이불도 있으니 추우면 덮으라고 덧붙인다. 그제야 소파에 누웠다. 잠은 오는데,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여사님 두 분이 들어와 아빠의 기저귀를 갈아주셨다. 두 분의 행동은 조심스럽지만 능숙했다.   

   

    문득 호스피스 입원 전에 있던 병동이 생각났다. 아빠는 보호자가 면회할 수 없던 병실에서 많이 불편해했다. 정신은 멀쩡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간호사가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했고, 핸드폰이라도 손에 안 잡히면 그 역시 간호사를 불러야 하는데,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아빠의 성격으로는 여간 불편하고 눈치까지 봐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간호사가 같은 병실 내 다른 환자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아빠는 그 병동에서 하루빨리 나오고 싶어 했다. 그걸 생각하니 여사님들이 의식 없는 아빠에게 대하는 모습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병실에 있으면서 나는 간호사와 요양보호사에게 늘 말을 건넸다. 특히나 요양보호사 여사님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예의 바르시고 잘 웃고 긍정적인 분인데, 갑자기 안 좋아지시니 참 서운하네."

"중간중간 귀에서 이어폰이 빠지면 내가 꽂아드렸는데, 이걸로 도움이 필요하시면 꼭 날 찾으시더라고(웃음)."

    

    새벽이 되고, 아빠의 컨디션을 보러 오신 여사님께 물었다.


“이 일 하시면서 일도 일이지만, 배우시는 게 많을 것 같아요.”

“당연하죠. 삶의 변화가 생기죠. 사람들이 왜 힘들게 이 일을 하냐 묻는데, 실제로 호스피스에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요.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고, 마지막을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이건 누구에게나 있는 과정이잖아요.


    말을 마친 여사님은 산소마스크 줄에 덧댄 거즈를 빼더니 아빠의 얼굴이 불편하지 않게 다시 모양을 잡았다. 팔을 보더니 팔이 너무 부어서 병원 팔찌에 쪼이겠다며 팔찌도 다시 해준다. 아빠의 손을 양옆으로 가지런히 해주시고 이불을 덮어주곤 내게 가족들도 힘들 거라며 누워서 쉬라 한다.     

 

    이런 얘기를 했을 때 누군가는 보호자가 보고 있어서 그런 거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호스피스 병실로 옮긴 후 마음이 편해졌던 아빠를 보면 보호자 앞에서만 그런 건 아니었단 걸 알 수 있었다. 종일 병실에 함께 있으면서 간호사와 요양보호사가 아빠에게 했던 소소한 행동들이 내게는 크게 다가왔다. 소소함 속에 배어있던 배려를 보았다. 

      


폐암이라는 크나큰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두려운 마음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는 것이

지금의 아빠에게 더 필요했을 것이다.


    의식이 없는 아빠에게 엄습해오고 있는 두려움이 나에게까지 왔다.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바다 한가운데서 손을 잡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다. 아빠 손을 놓칠세라 내 손에 힘이 더 들어간다. 어쩌면 오늘이 아빠와 함께한 마지막 밤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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