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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eak Oct 16. 2024

외할머니가 떠난 날, 방비엥

두 아들과 배낭여행 다시 쓰기-방비엥

1일 차: 어둠 속에 방비엥에 도착하다.

 루앙푸라방에서 방비엥으로 가는 길은 고속철도가 뚫리기 전까지는 여행자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길이 좀 좋아져서 6시간 내외가 걸리지만,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최소 7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라오스에 도착해서 고속철 티켓을 예매해서 남아 있는 표가 없어 18:00 기차를 타고 방비엥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기 전에도 한 바탕 다툼이 있었지만, 풀린 듯하여 방비엥에  도착한 후 인당 30,000낍씩 내고 다운타운으로 툭툭을 이용하여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푸니 20:00가 다 되어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방비엥의 짧은 하루는 보냈다. 저녁도 숙소 가까운 곳에서 먹는데 식사를 마칠 쯤엔 보슬비까지 내렸다.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도 비가 내리는 것으로 예보가 작성되어 있었다. 건기에 비가 내리다니, 지구 전체의 기후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느끼는 하루다. 

파자와 일몰로 유명한 그린 레스토랑

저녁을 먹으면서 휴대폰으로 내일 날씨를 확인하니 최고기온이 22-25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정도 기온이면 블루라군에서 수영하기엔 애매한 기온이라 걱정이 앞선다. 비가 내리면 전망대에 등산을 하기도 힘든 터라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게다가 저녁 이후로 아이들과도 티격태격하면서 관계가 부드럽지 않다. 뭐, 내일 비가 내리지 않는 기적을 바라며 혼자 숙소에 돌아와 맥주를 한 잔 한다. 조용히 하루를 돌아보는 이 시간이 없었더라면 여행은 이렇게 한 달 동안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

매일 저녁을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오래된 배낭여행 습관이다.


2일 차: 여행 갈등의 최고조와 외할머니 소식

 방비엥의 이틀차 날이 밝았다. 날은 밝았지만 날씨는 그다지 좋지 않다. 구름 낀 하늘과 25도가 안 되는 낮 최고기온은 여행 일정에 많은 변수로 작용한다. 게다가 클럽에 갔다 돌아오는 한국 여행객의 소음 때문에 밤에 꿈자리도 뒤숭숭했다. 일단 조식을 간단히 챙겨 먹고 수영은 못하더라도 블루라군이라도 둘러보고 등산이라도 할 생각에 오토바이를 몇 시에 빌리고 반납할지를 계산해 본다. 아이들은 어제 올리지 못한 가족 밴드 여행기를 올리고 오전 타임 15분의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이 끝나고 둘이 장난을 치다가 또 역시나 싸우기 시작했다. 조용히 시켰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화를 내며 다시 혼내고 일정을 계획하다 문득 짜증이 밀려왔다. 이렇게 화를 내고도 곧장 풀렸는데 오늘은 아이들도 나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 마지막 통첩으로 가방을 싸고 10분 뒤까지 준비하고 나오라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첫째는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나도 어느덧 배낭여행 내내 아이들에게 맞춰주며 여행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방비엥은 버릴 생각을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누워 버렸다. 둘째도 형이 안 가니 막상 나서기 힘든지 침대에서 불만의 소리를 내었다. 그래! 여행이 항상 즐거울 순 없지, 방비엥은 갈등의 공간으로 기억된다고 해서 그것이 실패한 여행이 아니라는 생각에 오토바이 렌트도, 블루라군도 가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비 오는 우중충한 날씨에 우울한 기분으로 다들 말이 없었다.

 침대에 누워 화를 삭인다. 아들이 아니었으면 벌써 여행은 끝을 맺었으리라. 친구였으면 이제부터 각자 여행을 하자고 고했을 것이고, 직장 동료였으면 진작에 홀로 여행을 하겠다고 얘기했을 것이다. 가라앉은 마음에 누워 있는데 카톡이 울린다. 와이프의 문자인데 느낌이 별로 좋지 않다. 문자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공허하게 채팅창에 걸려 있었다. 또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5일 남은 여행을 접고 비행 편을 알아보고 귀국할 것인지, 남은 5일을 무사히 보내고 귀국할 것인지. 누구도 나에게 그런 내용을 묻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드는 생각이었다. 귀국을 할까 생각했다가 금세 생각을 접었다. 비행기 표도 없고, 방비엥이면 기존 항공권을 모두 취소하고 비엔티엔에서 귀국한다고 해도 문상 기간을 맞추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따로 조용히 찾아뵙기로 다짐했다. 아이들에겐 얘기를 할까 말까 혼자 또 고민을 한다. 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어제 마시려고 사둔 맥주가 기억이 났다. 여행 2일 차 가출을 한 첫째 때문에 피웠던 담배도 하나 꺼내 문다. 혼자 테라스에서 담배와 맥주를 마시며 회한에 잠긴다. 문득, 류시화의 시가 떠오른다. 대학시절 내내 시인에게 빠져있다가 어느 날 문득 맘에서 떠나보낸 작가.

 자유를 그리워하기도, 자유에 지쳐 쓰러지지도 못하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자유를 갈망하며 이를 거부하는 것들과 부딪히며 살았다. 오늘 문득 류시화의 시가 생각나는 것은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그가 남아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인데 맥주를 마시며 방에 돌아오니 아이들은 아직 침대에 누워 자고 있다. 얽힌 실타래를 뭐부터 풀어내야 할까 고민이다. 나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리고 여행을 이어나갈지, 사실을 말하지 않고 화해만 하고 남은 일정을 이어 나갈지, 아무것도 결정하기 힘든 시간이다.

숙소에서 바라본 사진 한 장이 오늘까지 여행의 전부다.

 숙소에서 하릴없이 보낸 하루가 지나간다. 아이들에게도 사실을 알리고 예정대로 여행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일 비엔티안에 도착하여 탓 루앙 사원에서 108배를 드리며 외할머니의 명복을 비는 것뿐이다. 아이들은 조식만 먹고 점심을 먹지 못하고 굶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배가 고프다고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말하지 않고 그냥 스르륵 갈등이 해소되는 순간이다. 비가 계속 추적거리며 내려 숙소 앞 식당에 들렀다. 애들은 점심을 모 먹을 거 까지 포함해서 1.5끼를 먹고 들어갔다. 내일 비엔티엔으로 가는 미니버스를 예약하고 식당에 혼자 남아 맥주로 풀리지 않는 고민을 타파하기 위해 쏘맥 한 잔을 기울인다.

여행 중 처음으로 소주를 마셨다.


3일 차: 방콕도 아닌데 방콕만 하다 떠나는 방비엥

3 부자의 갈등이 끝났는 줄 알았지만, 어제 혼자 남아 식당에서 술을 마시며 가라앉아있던 앙금이 떠올랐는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날씨도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간단하게 걸어서 방비엥 한 바퀴 돌 생각이었는데 아이들은 따라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일단 조식을 먹었고 어제 예약한 비엔티안 미니밴 출발시간까지 3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동네 구경이나 할 겸 운동화 신고 혼자 숙소를 나섰다. 아이들에게는 짐을 챙겨놓고 기다리라고 하고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강 건너 블루라군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행을 하면서 틈틈이 달리기를 했지만, 달린 지도 오래되고 해서 달리기 복장을 하고 달릴 만한 코스로 찾아 놓은 곳인 강 건너편으로 갔다. 다리는 15년 전, 10년 전이나 비슷한 상태였다. 예전엔 통행료 같은 걸 받은 거 같았는데 요즘엔 없어진 모양이다. 다리는 중간중간 아래쪽 강이 보일 정도로 훼손된 곳이 있었지만, 오토바이들이 문제없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중간 중간 부서진 부분이 있어 주의를 요한다.

 강 건너편까지는 몸풀기로 걸으며 동네를 구경했다. 많이 바뀐 것도 그대로인 것도 섞여 있으면서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과 달리 도로가 포장되어 있어서 달리기 좋았다. 주변의 석회암 산과 붉은 테라로사를 밟아가며 천천히 달렸다. 어제저녁 2024년 목표를 하프코스 완주로 잡은 친구 녀석이 15km를 뛴 기록을 보내왔지만, 나는 자극받지 않고 3km를 뛰는 것에 만족했다. 10시쯤 되니 여행객을 태운 트럭과 버기 카와 오토바이의 대수가 늘어나며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방비엥 달리기는 9시 이전에 마치는 걸 추천한다. 돌아올 때는 주변 풍광을 구경하며 걸었다. 무언가를 말리는 주민들, 새총으로 쥐와 다람쥐를 잡아 위풍당당하게 집으로 향하는 자전거 탄 어린이, 닭과 어린 뱀의 싸움 등 짧은 시간에 많은 모습을 방비엥이 나에게 선사했다.

이 와중에도 아이들로부터 게임을 시켜달라는 문자가 쇄도했다. 여행 없이는 게임도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어림도 없다 자식들아...


                                                                   No journey, No game!!


쇄도하는 문자를 자연스럽게 지르밟고 숙소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체크아웃을 한 다음 과일 주스와 방비엥 샌드위치를 구매하여 11:50 비엔티안행 미니버스에 탑승했다. 이로써 아이들은 방비엥에서 숙소와 숙소 앞 식당만 둘러보고 떠나는 것이다. 여행이 즐거운 추억이 있으면 지랄 같은 기억도 있는 것이니 이 역시 괜찮은 것이라 생각한다.

방비엥 샌드위치 거리에서 점심으로 샌드위치 2개 구매

10분 늦게 비엔티안으로 가는 미니버스가 도착했다. 이곳 미니버스는 대부분 도요타더군. 운전석 뒷자리에 세 명이 나란히 앉았다. 벌써 우리 뒤에는 중년의 여행객 3명이 타고 있었다. 한 숙소를 더 들러 두 명을 더 태워 8명이 비엔티안으로 출발한다. 고속도로를 탔으니 1시간 30분이면 도착을 하는데, 비엔티안에 다 도착해서 굳이 휴게소에 들러 15분 휴식시간을 줘 슈퍼에서 음료 하나씩을 사 먹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카드게임을 했고 쌓인 갈등은 대충 풀렸다. 오면서 카드 게임을 하면서 보니 갈등은 실제로 나만 풀리지 않은 거였다. 아이들은 언제나 부모가 생각한 만큼 이상으로 빨리, 많이 짜증 냈다가 빨리 풀리는 거 같다. 

캠핑도 같이하는 숙소를 반환점 삼아 돌아오다 본 다양한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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