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에

2020년을 견디며

by 새벽종 종Mu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네이버밴드 독학캘리그라피에서 캡쳐

뭔가 알 것 같은 시기엔, 인간사회엔 안일과 인습 그리고 독선이 많았다.

그 점에선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대변화 직전이 인류 사회의 기반적인 개혁을 위해 가장 적당한 기회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러한 긍정적 관점을 피력하는 미래학자들도 적지 않은 걸로 안다.

긍정주의가 다 좋은 건 아니다. 긍정주의를 너무 강조하니 그 반사작용으로 긍정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논리도 나온다.


그렇다고 하나, '빨간머리 앤'이 비관주의로 침울하게 산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논리적 비교야 참고하면 될 일이고,

우리 발밑의 삶이란, 일부러라도 명랑하게 보지 않고서는, 너무도. 지나치게. 확실히 한심하고 지리멸렬하다. 있는 그대로 인식하자면, 우리가 백치가 아닌 이상, 정해진 공식대로 전개되지 않는 이 혼란하고 뒤죽박죽인 인간세상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자체가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그런데, 좀 엉뚱한 얘기 같지만, 사실 이 세상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정오 무렵에도,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건너편의 내가 사는 골목길과 그 옆의 서서갈비 식당을 1층에 둔 건물 유리창, 그 유리창에 비치고 있는 내가 서있는 쪽의 건물들, 그리고 그 위로 밝고 푸른 하늘. 그것들을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내 가슴으로 스며들어오는 감동 한 줄기를 느꼈다.


이 감동은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긍정이자 수용일 것. 골목길이 유달리 아름다운 바도 아니고, 유리창에 비친 건물이 또 유달리 멋졌던 것도 아니나, 그저 햇살, 거리, 나의 집, 나의 이웃... 이런 것을 누리고 있는 현재에 대한 내면적 기쁨 같은 것 말이다.


뭐 특별히 좋은 일이 생겼나 보다고?

아니다. 내 눈이 뭐에 마주쳐도 오늘만은 기쁘다 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하다면 평범한 보통의 일상이 진행되고 있는 하루 중의 가운데 토막이었다. 날씨는 추웠고, 나는 감기가 무서웠고, 김장김치 반포기를 받았고, 이틀 앞으로 마감이라는 중국어 논문 퇴고를 잘 마칠지 해 봐야 알겠고...(좀 더 담대해져라! 주문을 건다)

김치를 주고 가야 맘이 편하겠다는 지인의 인정에 쪼르르 수유역에 갔다오는 길. 동네 입구

그리고, 지인 하나에게 작정하고 따지는 중이었다. 근래에 교제의 범주에 들어온 여자인데, 욕심, 인색함, 좁은 소견 등의 복합성으로 한사코 내게 심술을 보이는 존재다. 헤아려보면, 막내로 태어나 동생도 없었던 내가, 자기만의 탐욕에 젖어 눈에 뵈는 게 없는 동생뻘의 그 여자를 자매의 맘으로 받아주길 2년. 물론, 그 시간 속에는 그녀가 어쩌다 동생 맘이 되어 그녀만이 해 줄 수 있는 도움을 주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 고마운 기억 마음에 저장해두고 있기는 하지만, 무례함이 도를 넘고 있다.




어딘지 참 심각해.


그런 와중에 찬바람 속에 문밖을 나온 것이다. 3,4일만인가. 그래선지 오가는 길 15 분 정도 사이에 몸 생각 엄청했다. 누가 들으면 건강염려증 내지는 선천성 허약체질인가 의아해했을 지도 모른다.

꽃병과 꽃이라는 작은 장식품, 화장실 세면대도 사랑해.

이러다 감기 덧들면 안 되는데... 그런 걱정이 들만큼, 체감상 바람은 한겨울 칼바람이었다. 머리통부터 어깨 등뼈까지 몸속이 다 시렸다. 모자도 쓰고 옷도 적당한 정도로 입었는데도 으스스 추운 것이 불안하였다.


그런 몸으로 불려 나간 것은 김장 겉절이 선물 때문이다. 돌아와서 콧물에 재채기에 그걸 받아오느니 집에 그냥 있어야 했다는 일말의 후회가 밀려왔지만, 인정이 무엇인지, 오늘 이렇게 김치를 핑계로 보고 가겠다는 그 마음을 모르는 척, 나 좋을 대로 미루자 할 수 없었다.


감기가 들게 되어도 할 수 없어.

밀고 들오는 사람의 마음, 그걸 다 반기자는 건 아니지만, 어떤 날은 그 마음이 직진할 수 있게 내 쪽에서 활짝 문을 열어 두는 게 맞지 싶은 날도 있다. 그 마음이 내 마음은 아닐진대 꼭이 내 수요와 일치하는 건 아니어도 그래도 주고받는 게 옳은 것 같은 그런 날, 그러느라고 감기로 다시 앓게 된대도 다 감수하고 말 일이다. 회복력은커녕 영양섭취도 자신 없어 병이 정말 무서운 나이이긴 하지만... ( 건강하게 해 주세요! )


그렇게, 한 달씩 끌지도 모르는 수상한 오한 증상이며, 경우 없는 지인과의 설전(舌战)이며 얻어먹는 김치 한 그릇이며, 내 아무리 똥줄이 빠지게 써도 어느 구절에 이르면 편집자의 한숨을 피할 길 없을 중문(中文)논문이며... 그런 것들로 채워진 하루의 한가운데서, 크게 좋은 일도 크게 나쁜 일도 없이 오늘도 이렇게 또 하루만치 늙어가는구나ㅡ하고 내 기분이 땅으로 가라앉고 만다 해도, 딴은 그럴 만 하다고 누군가 고개를 끄덕여줄 것도 같은 그런 날 그저 그런 차림으로 신호등 아래 멈춰선 나...


그런 내가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어지길 기다리며, 건너편 건물 유리창에 비친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햇빛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이 너무 좋다고 막 설레여지는, 이 환희 어린 벅참은 대체 뭐란 말인가.


설명하기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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