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언어, 24개월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 나를 가장 캐주얼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내 취향을 알려주는 것일 거다. 이력은 너무 급하게 나에게 이름표를 다는 느낌이고, 성격은 오랜 시간 두고 봐야 조금 가늠하게 되는 부분이니까. 그러니 취향은 급하지도 오래 걸리지도 않게, 그리고 기분 좋게 나를 형용하는 방법이다.
아주 어렸을 때는 취향이라는 게 다소 일차원적이었다. 파란색이 예뻐 보인다든지, 계란이 더 맛있다든지와 같이 단순한 선호 정도였달까. 뿌리가 깊지 않은 마음이니 타인이 좋아하는 것이 곧 쉽게 내 마음으로 물들곤 했다. 나보다 큰 사람들의 취향이 더 크고 견고해 보여서였을까.
사춘기를 진입했을 쯤에는 광기 어린 집착이 만연했던, 이름하야 덕후시기를 지나야 했다. 이 때는 남들이 잘 모르고 나만 알 것 같은 보석 캐기가 어찌나 재밌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나만이 독특하고 고유하다는 것을 증명해 내기 위한 지독한 몸부림이지 않았나 싶다. 그래야만 내가 빛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나를 돋보이기 위한 마음에는 타인을 향한 은근한 무시가 조금이라도 섞일 수밖에 없나 보다. 그때는 거대자본이 투입된 헐리웃 영화가, 개성 없이 립싱크하는 아이돌들의 노래가,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훈계를 하는 자기 계발서나 소소함의 극치인 에세이가 시시하고 지루해 보였다. 그 대신 미장센이 아름답고 상처 받은 주인공이 나오는 여백 있는 영화가, 몽환적인 비트에 처음 들어보는 음색을 지닌 가수의 음악이, 명철한 시각으로 삶의 본질을 꿰뚫고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문구가 나오는 고전문학이 좋았다. 자기의 것이 분명한 사람들이 낳은 것들에 대한 고상한 동경은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내 취향을 붙잡고 소유하려는 데에 꽤나 오랜 시간을 쏟았다. 이 시기 나는 작은 노트에 내게 영감을 주거나 오래 기억하고 싶은 모든 것을 기록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사뭇 미련하기도 하지만, 이 순수한 열정이 아직까지도 내게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 내려 가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광기 어린 어린 내게 그래도 고맙다.
이십 대 후반에 다가섰을 무렾, 취향에도 여유가 생겼다. 나만이 특별한 게 아니라 나‘도’ 특별하다는 마음이 어느덧 바탕이 되어줬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세상에 특별하지 않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니 쉽게 볼 진심도 없고.
요즘 나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담아 만든 헐리웃 영화를 보며 스트레스를 푼다. 치열하게 노력하여 무대에 선 아이돌의 음악을 들으며 우주와 춤을 추는 순간이 행복하다. 지친 하루의 끝에 읽는 누군가의 평범한 고백이 담긴 에세이가 큰 위로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내가 별 볼 일 없다 생각했던 취향을 가진 사람인 남편을 만나고 사랑하며 시작되었다. 굳이 멋져 보이려고 하지 않는, 늘 너그럽고 담백한 사람이 내 옆자리에 앉자 내 취향의 폭도 한껏 넓어졌다. 그렇게 그저 그래 보였던 것들에 대해 내가 가졌던 편견을 걷고 그들의 진면목을 알게 될 수 있었다.
취향의 사전적 의미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이라고 한다. 마음의 방향이라니 취향이 생기고 변화하는 일련의 유기적인 과정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 느껴진다. 내가 취향으로 나를 견고히 하고, 부서뜨린 것과 같이 우주도 또 다른 취향의 여정을 갖게 되겠지.
요즘 24개월의 우주는 작은 취향이 생기고 있고, 좋아하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로써 표현하며 요구하고 있다.
“뽀로로 움로수 하나만 주데요!”
“거북이 책 좀 읽어보까?”
라고 말하며 ‘엄마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매일매일 힌트를 주고 있다.
우주가 기억하지 못할 것이 당연하기에 굳이 24개월 우주의 취향을 나열하고 싶다. 크레용으로 엄마 손에 낙서하기, 숨바꼭질에서 술래만 하기, 냉장고 자석 이야기 듣기, 스티커 붙였다가 떼기, 색종이 구기기, 빵을 손으로 가루 만들기, 청소기를 따라오며 빗자루 휘두르기, 만화에 나오는 대사를 말투도 비슷하게 따라하기, 식탁에 앉아 엄마가 요리하는 것 보기, 손을 잡고 걷기, 아빠에게 안경 씌우기, 엄마에게 사랑한다며 볼을 비비기.. 너는 이런 걸 좋아했단다.
우주가 겹겹이 생길 취향의 첫 페이지를 써내려 가고 있다는 게 사뭇 멋지다. 우주 마음의 방향이 어디를 향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조금 무섭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