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2)
방학이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편하고 좋지만 또 어렵고 힘들다. 그냥 평범하게 얘기하면 될 것을 자꾸만 말이 아닌 돌을 던진다. 내 속에서 물이 튀고 힘드니까 그만하라고 해도 자꾸만 던진다. 큰 아이는 툭툭 거리는 말투로, 둘째는 게으른 태도로 날 시험에 들게 한다. 참다 참다 한 마디 하면 아이들이 더 크게 화를 내니 죽을 맛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편한 시간이 흐르고. 사춘기가 호환마마보다 어려운 건 아무도 그 시작도 끝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끊임없이 돌을 던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향해 돌을 던진다. 말일 때도 있고 행동일 때도 있고, 그 무엇이든 매일 던지고 또 던진다. 그냥 지나갈 일이다 세뇌하며 이겨내 보려고 애써본다. 책도 읽고 노래도 듣고 수다도 떨고 주문도 외운다. '그럴 수 있다. 좋게 보자, 기다리자. '말하면서. 수양하듯 다짐하지만 내 정신력은 옆에서 누가 자든 뒹굴든 상관없는 5중 쿠션 최고급 매트리스도 아닌지라 금방 깨지고 부서지고 만다. 말 그대로 유리멘털. 백발백중 맥없이 무너지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자책하는 무한루프가 형성된다. 챗GPT에도 묻고 유명강사의 유튜브를 보면서 답을 찾아본다. 아이들이 던지는 그 돌은 그들이 내게 전하는 아이들 마음의 초대장이고 관심인 것 같은데, 나는 너무 아프기만 하다. 엄마를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해 달라 칭찬해 달라 또다시 매달리는 아이들.
아, 진짜. 어쩌란 말이냐
아름다운 구속이란 있을까
아이를 사랑해서 잔소리를 하고 미래를 생각해서 걱정하고 지금 내가 하는 것은 현재를 위한 것인지 미래를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아이를 위한 것인지 나 조차도 가늠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 아이들에게 그 감정을 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싱클레어가 구속하고 억압했던 프란츠라는 어둠에서 벗어나 다시 데미안이라는 아이에게 압도되는 것처럼. 프란츠와 데미안을 만나고 기나긴 방황 끝에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온 싱클레어. 아버지는 싱클레어의 머리를 뒤흔들어 놓았던 데미안의 성경 속 카인에 대한 급진적 해석 대신에 고전적 설명으로 그에게 익숙한 편안함을 준다.
부모는 그저
편안한 안식처, 그 자체가 될 것, 그리고 일관될 것. 이성적인 부모보다 따뜻한 부모가 먼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머리를 띵! 하고 때린다. 그저 묵묵히 기다리다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고 안아주면 될 일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구속이고 편안한 쉼터가 아닐까. 울퉁불퉁하고 미성숙한 그 존재자체로 받아주고 안아주는 것, 그게 왜 나는 이다지도 어려운 걸까.
아마도 아이들은 내게
마음을 더 키우라고
너무 좁아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호소하듯 돌을 던지며
시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크로머라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것은 나 자신의 힘과 노력을 통해서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의 오솔길들을 똑바로 걸으려고 했는데, 그 길들이 내게는 너무 미끄러진 것이다. 친절한 손 하나가 나를 구해낸 지금, 나는 눈길 한 번 팔지 않고 곧장 어머니의 품 속으로, 포근히 에워싸인 경건한 유년의 아늑함 속으로 달려왔다. 나는 자신보다 더 어리게 더 의존적으로, 더 어린애처럼 만들었다. 나는 크로머에 대한 예속을 새로운 의존으로 대치해야만 했던 것이다. 혼자는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데미안, 62쪽,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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