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4)
잘은 모르지만, 자기 안에 부정적인 감정에 집중한 나머지, 도무지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을 때, 불안이 자신을 압도하고 뭔가 해도 안된다고 믿고 금방 포기하고 싶을 때, 아니면 누군가 자신을 내가 뭘 해도 봐줄 거라고 믿고 있을 때 보란 듯이 자신을 나락으로 던져버리는 걸까. 때때로 아이들은 상대의 사랑과 인내심의 깊이를 실험하듯이 깊은 절망과 타락의 골짜기로 자신을 기꺼이 내던진다. 싱클레어가 그랬다. 시작은 호기심이었지만 결국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어느 날, 손님처럼 다가온 데미안은 언제나 그렇듯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남겼고 그것은 싱클레어의 전부를 점령해 버렸다. 첫눈에 반한 여인, 베아트리체도 잊게 만들고, 무의식적으로 그린 그림이 결국 데미안이 되어 나타날 만큼 그것은 강력했다. 그의 말은 망치였다. 기어코 싱클레어를 둘러싼 검은 막을 깨서 부수고 말았다. 그 후, 싱클레어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닫힌 문
아들의 문은 오늘도 닫혀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거나 소리쳐도 들리지 않을 만큼 두터운 벽이 하나 더 있다. 그는 그 안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아들은 고2고, 게임을 좋아한다. 그 좋아하는 게임을 밤이고 낮이고 한다. 가끔 화가 난 아빠가 컴퓨터를 잠가버리면 휴대폰으로 한다. 그렇게 취미가 생활을 점령해서 그 속에서만 산다.
가끔 문을 열고 나오면 밥을 달라고 하고 무작정 관심과 사랑을 달라고도 한다. 상대는 배려치 않은 엉뚱한 시간과 맥락에 자신의 요구사항만 던져놓고 어이없어 답을 못하면 화를 내고 그의 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아침 8시, 밥을 차려놓고 아들을 부른다. 답이 없어 문을 두드리고 기다려봤지만 묵묵부답, 한 시간쯤 후,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게임을 시작했나 보다. 한심한 모습에 할 말을 잃는다. 포기하고 혼자 밥을 먹고 치울 때쯤 웅장한 발소리가 들린다.
배고파. 밥 줘
당당한 그 목소리에 분노가 치밀지만 눈도 마주치기 힘들 만큼 화가 나지만 참는다. 어금니를 깨물고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방금 끓여놓은 미역국에 밥을 내놓는다. 우걱우걱 씹어서 후루룩 한 그릇을 먹고는 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또 게임 삼매경, 그러다 가끔 나와 말한다.
엄마, 치킨!
귀엽지도 재밌지도 않은 외마디 외침, 맥락에 맞지도 않는 엉뚱한 말이라 대답대신 짜증이 올라오고, 퉁명스랍게 받아치는 내 말투에 왜 화를 내냐고 또 화를 낸다. 이렇게도 자기중심적인 건 아무리 사춘기라 해도 참기 힘들다.
누군가는 기다리면 철드는 때가 올 거라고 말하지만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참기 힘든 순간이 계속된다. 나태한 생활을 하는 그에게 난 소비되는 존재고 이용되는 어른일 뿐, 모성애를 발휘하여 예쁜 점을 찾으려 애써봐도 찾을 수가 없다. 지금 내가 낳은 아들은 그 흔한 공부하라는 말조차 꺼내기 힘든 폭군 상관이 되어버렸다.
가장 화가 나는 건
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 현란한 게임 속에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내어주는 것, 그 끝에는 즐거움, 쾌락 말고 무엇이 남을까.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재미없는 공부, 힘든 운동뿐이라고 해도 각성 없이 너무 쉽게 자신의 대부분의 시간을 게임에 내다 바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그는 모르고 있다.
가상의 세계에서 그가 하고 싶은 뭔가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실제 자신의 삶에서도 뭔가를 해서 그 성취와 쾌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그게 진짜라는 것을 그는 모른다. 힘들고 어렵지만 그런 과정이 결국 진짜 내 것이 된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힘들고 귀찮고 재미없고 또 보이지도 않는 중요한 것들은 아이들의 삶 속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다. 한 장 풀고 내던져진 문제집, 언젠가 한 번은 읽어봤을 먼지 쌓인 책에 손 내밀어 펼쳐 볼 여유가 없다. 접속하면 언제든 열리는 게임 세계는 쉬는 시간이 없기에.
나가야 한다
문을 박차고 나가야 한다. 시원한 바람을 쐬고 다리가 빳빳해지도록 걸어보고 다양한 친구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 데미안이든, 싱클레어든 만날 것이다. 데미안 같은 친구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도 온라인 세상에 있을까). 이제는 끄집어내기도 어려울 만큼 커져버린 아들, 불러도 외쳐도 답이 없는 문에 손을 동그랗게 모아 힘껏 두드린다. 일어나라고 여길 보라고,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내 말 좀 들어보라고, 내 말이 망치가 되어 그를 둘러싼 검은 벽이 깨지길 바라며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
아들아, 이걸 알아야 할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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