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6)
첫인사
올해는 새로 발령받은 학교에서 학년부장을 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우리 교무실 전체가 모두 새 사람, 기존에 근무했던 사람은 없다. 오늘은 연수 첫날, 부서별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한다. 젊고 야무져 보이는 담임선생님들 4명, 모두 80년대, 90년대생 샘들이란다. 나랑은 10살 이상 차이가 나고, 새삼 내 나이가 엄청 연로하게 느껴진다. '내가 벌써 그렇게 됐나. 진짜 왕언니네~'. 그리고 이런저런 자기소개 끝에 솔직하게 고백한다.
저는 크고 굵직한 건 잘 보는 편인데
작고 디테일한 것은 못 보는 편이에요. 특히나 숫자에 약해요.
그러니 우리 서로 도와 잘해 보아요.
잘 부탁드립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 보려고 솔직하게 나의 약점도 장점도 드러내 얘기해 본다. 나이가 드니 이렇게 뻔뻔함도 생긴다. 올해는 얼마나 재밌고 신나는 일이 생길까. 설렘 반, 걱정 반 그렇게 첫인사가 마무리된다.
끝인사
같은 날, 지난해까지 근무했던 학교 선생님들과 송별회를 한다. 할 일은 많지만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급히 발길을 돌린다. 부랴부랴 도착한 약속장소, 익숙한 얼굴들이 환하게 나를 반긴다. 그중 몇몇은 주섬주섬 선물도 건네고 편지도 주신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가득. 손도 잡고 안아주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나눈다.
집에 와서 한아름 받은 정성스러운 선물의 포장을 뜯고 편지도 읽는다. 특히나, 편지를 너무 읽고 싶었다. 직업상 타인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에 선수들이 본 나의 모습이라 한 문장, 한 문장이 귀하고 소중할테니.
1일 견과류가 포장된 큰 상자에 매일 자기를 생각하며 먹으라는 애교 섞인 메모를 적은 그녀, 그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교과 영어선생님 중 한 명이고 1등으로 살갑고 또 사랑스러운 후배고 동생이다. 올해초, 같이 상조회를 시작하면서 꼭 탄핵당해서 조기에 업무를 종료하자고 의기투합했건만 결국 송년회까지 롱런한 그녀들은 누구보다도 끈끈한 우정을 쌓고 정성스러운 선물과 편지를 내게 건냈다. 다방면에서 열정을 보여 멋졌다고, 즐겁게 사는 모습이 좋았다고 앞으로도 그 모습 잃지 말라는 응원의 말을 적어주신 그녀들은 그 많던 일을 야근에 초과근무까지 하면서 불평 없이 묵묵히 하시던 보살님이었다. 어디서든 나의 뜻을 활짝 펼치라고 적어주신 왕선배님의 말씀은 너무 깊고 따뜻했다. 그리고 마지막,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제일 마지막에 작별인사를 하면서 가방 깊숙이서 선물을 꺼내준 그녀, 그녀가 준 코스터의 문구가 나를 울린다. 평소에 절대로 허튼 말을 하지 않고 매사에 온전히 정성을 다하는 그녀다. 그녀가 나를 위해 고르고 고른 선물이라 이 말이 찐이라는 걸 안다. 말이 뜻이 되어 깊숙한 곳으로 훅 들어온다.
길들여진 사람들
오래 만나서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진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친해진 사람들이다. 크고 작은 일을 같이하고 신뢰와 친근감이 쌓이면서 서로에게 투명한 거울이 된다.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다른 면을 발견하는 다정한 타인은 깨끗하게 나의 모습을 비춰준다. 어떤 이는 더욱 이쁘게 어떤 이는 더욱 깊게 비춰주기도 하면서. 오랜 인연은 참으로 귀하다.
길들여질 사람들
새로 만난 사람과는 설렘과 호기심으로 서로에 대한 정보를 쌓아간다. 서로 다른 성격과 빛깔을 빠른 시간에 탐색하고 받아들인다. 즉각적인 피드백은 없지만 그들의 눈에 마음에 나라는 사람이 읽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의 시간동안 작고 사소한 일을 나누고 사부작사부작 이야기가 쌓여가는 속에서 우린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길들여지겠지.
데미안도 중요한 타인을 여러 명 만난다. 처음에는 프란츠를 만나고 그다음에는 데미안, 그리고 피아니스트 피스토리우스도 만난다.
싱클레어는 특이한 음악가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고 자신에게로 길에 한 걸음 더 내딛게 된다. 그는 외부의 시선이나 비교를 통해 스스로를 나무라는 일을 멈추라고 말한다. 또한, 좋은 뜻을 가진 착상들을 몰아내고 그걸 이리저리 도덕화해서 해롭게 만들지 말라고 충고한다. 자신을 이해하는 일에 너무 가혹한 비판이나 계산을 하면 진정한 자신이 되기는 힘든 일이라고 하면서.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나는 나를 제대로 보는 것에 미숙했다. 그저 남들이 좋아해 줄 내 모습에만 신경 썼지 나를 편하고 자유롭게 표현하고 보는 것은 못했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은 언제나 부끄럽고 어려운 일이었고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말하는 것은 어린아이 투정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예전에는 겸손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알았으니, 나의 장점을 얘기하는 것은 정말 손발이 오그라드는 일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내 욕구를 말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되고 말았다.
당당하게
어느 순간, 나를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이는 것이 창피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자신을 솔직하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사실도. 이제 더이상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느라고 회식자리에서 '아무거나'라는 메뉴는 외치지 않는다. 큰 소리로 '오리고기 먹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진짜 뭘 먹어도 상관없을 때만 '아무거나'를 외칠 뿐. 이렇게 내 욕구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니, 지인들은 메뉴가 빨리 정해져 좋아하는 눈치다. 행여 서로 다른 의견이 나와도 인정하고 차선책을 찾거나 번갈아 서로의 욕구를 따르는 규칙을 만들기도 하면서 소통이 깊어지기도 하고. 내 본심에 어긋나는 언행은 나의 몸도 마음뿐 아니라 타인도 힘들게 만든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만의 길
하나의 일이 끝나고 또 다른 일의 시작에 앞서 나는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소중한 인연을 통해 나의 정보를 잘 모으고 다듬어 보다 또렷한 나의 길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나만의 길을 찾아 눈치보지않고 뚜벅뚜벅 걸어갈 뱃짱도 생겼다, 모두 나의 인연덕분이다. 이정표가 되어준 나의 친구들, 그리고 동료들. 다정한 이들의 칭찬과 격려의 말과 몸짓이 나의 길은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또, 위축되거나 과장없는 있는 그대로의 성찰, 자기 긍정과 위로의 말로 나는 매일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뻔뻔하고 당당하게
나의 길을 알고 또 가고 있다는 건
정말 기분좋은 일이다.
#라라크루14기
#데미안
#시작과끝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