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요 몇 달간 mbti 검사 결과에 빠져서 나와 같은 infp들의 성향과 특징을 찾아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오래전 대학교 교양 시간, 그때도 mbti검사를 했었는데 그때는 '아 그렇구나' 하고 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었다. 2000년대 초반은 혈액형으로 사람들의 성격과 특징을 나누는 것이 대세였었다. "B형 남자는 만나지 마세요."이런 류의 글들이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십여 년이 지나 다시 몇 번을 검사해봐도 나는 그때와 같은 infp라는 결과가 나왔다.
infp의 특징을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안도가 되었다고나 할까, 몇 번을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 나만 이런 게 아니었어' 안도의 말과 함께 이 우주에서 나만 성격이 이모양으로 생겨먹은 걸까, 나만 이렇게 삶이 버거운 걸까 라며 심각하게 고민했었던 나날들이 위로받는 듯했다.
비록 지구 상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부의 사람들이 나랑 비슷한 고민의 무게를 짊어지고 힘겹게 살아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넷상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infp의 특징이 그냥 나 자신 자체였고 그동안의 나의 삶이었다.
자기 비하가 심한 편이고 남 눈치도 많이 보고 타인의 말 한마디에 나 혼자서 수만 가지의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며 이랬을 거야 저랬을 거야 라며 전전긍긍해한다.
내가 제일 견디지 못하는 말이 "할 말이 있는데 내일 이야기하자."이다. '왜? 지금 얘기 안 하고 내일 하는 건데? 그냥 문자로 하라고! 왜 하루 동안 나를 피 말리는 거냐고!' 라며 속으로 외쳐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지난번에 내가 뭐 실수라도 한 게 있었나.' 걱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하루를 1년처럼 나 스스로를 들들 볶으며 그 사이에 지옥을 몇 번이나 갔다 오는 경험을 한다. 그런데 막상 들어보면 정말 별일이 아니었을 때도, 그래서 천만다행이었던 적도 있었고 내 예상 결과와 비슷하게 맞아떨어져 더욱더 나를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때도 있었다. 어쨌든 상대방이 나에게 준 하루라는 시간을 마치 천벌이라도 받은 듯 괴로워하며 기다리고 마치 상황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상대가 쥐고 있는 양 스스로 을을 자처한다는 것이 참 안타까울 뿐이다.
또한 천성은 게으른데 남한테 폐를 끼치거나 욕먹는 것은 죽어도 싫어하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울면서도 무조건 끝내고 만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수없이 나를 자학하고 상황을 원망하고 다시 자기 비하를 반복한다. 그러다 보니 조직생활보다는 혼자서 일하는 프리랜서라는 직업이 좀 더 맞는 편인데 또 마음은 늘 불안하다 보니 불안정한 프리랜서라는 위치를 못 견뎌한다. 그래서 다시 조직이라는 단체에 들어가 보는데 거기서 파생되는 수많은 인간관계와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견디지 못해 다시 도망 나오기 일쑤다. 이런 사람들이 infp이고 나 자신인 것이다.
물론 이런 성향이 있어도 사회에 잘 융화되어 살아가는 infp 들도 많다 그리고 infp들이 비록 유리 멘탈을 가졌지만 도덕성, 윤리의식은 강해서 결코 법을 어기거나 공동체 생활에 해가 가지 않는 인물들이다. 또한 예술적 감성이 뛰어난 편이라 예술가들 중에 infp가 많기도 하며 가장 큰 장점이 공감능력이 뛰어난 편이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누구보다 활발하며 그들 앞에서는 개그맨을 자처할 때도 있다. 그래서 본인이랑 잘 맞아떨어지는 환경과 사람을 만나면 참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환경과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외부환경에 노출되어야 하는데 또 그건 질색하다 보니 현실을 산다기보다는 상상을 주로 하고 공상 속에 사는 그런 인물이다.
이런 infp가 가장 원하는 인간상이 있다면 아마
'무던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외부의 자극에 덜 예민하고 남의 시선에서 무덤덤한 '그러든지 말든지' 또는 '그럴 수도 있지 뭐'의 태도를 가진채 성실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을 늘 동경한다.
무던하다의 정확한 뜻을 알아보기 위해 사전을 검색하니 "성질이 너그럽고 수더분하다.", 영어로는 "easygoing"이라고 나온다. easygoing의 사전적 의미를 떠나서 그냥 문자 자체로도 쉽게 가는, 이지고잉 한, 이거야말로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의 태도이다.
꽃에도 그런 무던한 꽃이 있을까
나는 그런 무던한 꽃으로 제비꽃을 들고 싶다.
나의 브런치 작가명 '길가의 꽃'이 가리키는 것도 바로 이 제비꽃이다.
제비꽃은 우리가 길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꽃이다. 보도블록 사이, 폐건물의 갈라진 콘크리트 틈 사이, 산 언덕 바위틈 사이, 어떻게 이런 곳에 꽃이 있을까 싶은 곳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이처럼 제비꽃은 어느 환경에서나 잘 자라고 번식력이 좋아 도시, 시골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들꽃이다.
제비꽃은 보통 4월에서 5월 사이에 개화하며 우리가 길가에서 흔하게 보는 제비꽃은 보통 보랏빛을 띤다. 그래서 영어로는 바이올렛(violet) 스페인어로는 비올레타(violeta)라 불린다. 하지만 보라색 외에도 노란색 흰색 등 꽃 색깔이 다양할 뿐 아니라 850여 종의 제비꽃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중 우리나라에는 40종 이상이 분포해있다. 키는 10cm 남짓으로 자세히 보려면 몸을 낮추어 들여다봐야 할 만큼 나지막한 꽃이지만, 제비꽃은 꽃을 피우지 않아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즉, 수술을 암술에 직접 닿게 해서 스스로 수분할 수 있는 강인한 꽃이기도 하다.
어디서나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을 만큼 척박한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곤충이 오지 않아 봄 동안 꽃을 피우지 못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며 쿨하게 스스로 수분을 하여 열매를 맺는 이 제비꽃이야말로 무던하면서도 성실한, 그래서 이 세상 모든 infp들이 곁에 두고 싶어 할 만한 그런 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infp는 작은 것에도 마음을 쉽게 다치는 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소한 것에서 행복도 많이 느끼는 유형이다. 매사에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하며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다가도 길가에 핀 작은 꽃을 우연히 마주친 순간, 시원한 밤공기가 갑자기 코끝을 스치는 순간,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순간 같이 찰나의 소소한 순간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어쩌면 소박하며 귀여운 유형이기도 하다.
그런 infp가 길을 걷다 보도블록 사이에 핀 제비꽃을 발견한다는 것은 버거운 삶을 버티며 살아가다 만나는 작은 선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험하고 거친 길바닥 틈 사이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제비꽃을 보며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와도 같은 이 삶을 좀 더 견뎌내며 살아봐야겠다는 의지를 다질지도 모른다.
세상 곳곳에 존재하고 있을 infp의 발걸음마다 제비꽃이 피어있길 바라며 올해 봄, 나도 제비꽃을 찾아 열심히 길거리를 배회하며 다녀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