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지아
보통의 평범한 우리가 꽃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을 때가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특별한 기념일, 어버이날? 그것도 아마 꽃이 메인이 아닌, 선물을 돋보이게 할 정도의 부수적인 장치로써 꽃을 구입할 때가 대부분이지 않을까.
이 일년의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이벤트 같은 꽃 선물이 아무 날도 아닌 평범한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에게 불쑥 받게 된다면 어떠한 기분이 들까? 아마도 그날의 기억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찍혀 자신의 인생 챕터 속 행복한 한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사진같이 선명히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2004년 22살, 인생 진로를 두고 방황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방황조차 순수하고 아름답다 여겨지지만 그때 그 시절의 나는 치열하게 고민했었고 불안한 미래의 무게로 힘들어했었다. 다시 오지 않을 반짝반짝 빛나던 22살의 그해 봄, 난 어둡고 답답한 학원 독서실에 앉아 자기 연민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왠지 처량한 기분과 누가 나에게 빚진 것도 없는데 괜히 억울한 심정에 내 청춘이 고작 이곳에 찌그러져 있다는 자괴감까지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내 표정이, 내 목소리가 주변에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점심 약속을 하고 학원 아래층으로 터덜터덜 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꽃다발을 내 얼굴 앞에 불쑥 내미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나머지 짧게 소리 지르며 꽃다발에 가려진 얼굴을 바라보니 상기된 표정의 내 친구가 노란 프리지어 한 다발을 들고 그곳에 서있었다.
지금 다시 그 순간을 생각하면 괜히 코끝이랑 눈가가 빨개져 오지만 그때의 나는 친구랑 마주 보고 그저 깔깔 웃어대기만 했었다. 우리 둘은 별다른 말 없이, 친구도 왜 꽃을 나에게 주는지, 나도 갑자기 웬 꽃이냐고 묻지 않은 채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나도 그 친구도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노랑 프리지어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알고 있었다.
친구는 그 후로 한참 뒤 내 결혼식에서도 꽃을 들고 눈시울을 붉힌 채 축가를 불러줬었고, 몇 년 뒤 내가 플로리스트가 되었을 때도 많은 응원을 해주었다. 지금은 각자 삶이 바빠 일 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들지만 어느 날 별다른 이유 없이 내가 만든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찾아가 친구에게 불쑥 내밀어야겠다는 생각을 지금 이 글을 쓰며 한다.
특별한 날도 아닌, 어떠한 이유도 없이 받아 본 꽃은 22살 그 시절 그 친구가 전해준 노랑 프리지어가 처음이자 마지막인듯하다. 그래서 지금도 꽃시장에서 프리지어가 나오는 시기가 되면 난 22살의 그때로 돌아가 나를 바라보던 해사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살아가면서 나의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꽃이 함께했었다. 하지만 중요한 삶의 순간 속 화려한 꽃다발이 아닌 평범한 어느 날, 소박한 꽃 한 송이의 향기가 더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무를 때가 있다.
아무런 이벤트도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지루하고 약간은 우울했던 내 청춘의 한 챕터 속, 한 다발의 노랑 프리지어 향기가 아직도 내 곁에 남아 그 시절의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